1960년 지금의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김영찬 씨(57)는 한 번도 초중고교를 동네에서 다니지 못했다. 마을 안에 학교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치동은 학원은커녕 학교도, 심지어 전기도 안 들어오던 시골 동네였다.
○ ‘사대문 안’으로 유학 가던 ‘깡촌’
김 씨가 아버지, 할아버지를 거슬러 8대에 걸쳐 살아온 대치동 옛 마을은 오이나 호박, 무, 배추 같은 채소 농사를 짓던 곳이었다. 1963년 서울 성동구로 편입되기 전까지 경기 광주에 속하던 곳으로, 100여 가구 정도 되는 마을 대부분이 초가집이었다.
“우리 어머니가 건너 돌말(현재 석촌동)에서 시집왔다가 놀란 거잖아, 전깃불도 없어서. 창피해서 친정에 말도 못 했대.”
김 씨가 초등학생 때까지 옛 마을에서는 석유를 부어 불을 밝히는 호롱불을 썼다. 전기가 들어온 것은 1971년이다. 전깃불이 없던 시골에는 학교도 없었다. 김 씨는 지금의 강남구 청담동 자리에 있는 언북초등학교까지 매일 십 리 길을 걸어 다녔다. 대치동에 초등학교가 생긴 것은 김 씨가 졸업한 후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대치동 아이들은 중학교 역시 ‘(사대)문 안’의 다른 동네로 다녀야 했다. 대부분 ‘똑딱선’이라고 부르던 나룻배를 타고 성동구 성수동에 있는 중학교를 다녔다. 현재의 탄천2교 근처에 있던 청담동 나루터부터 성수동 뚝섬유원지 부근을 잇는 나룻배였다.
“우리 친척 형도 그렇고, 아예 ‘유학’을 가는 사람도 많았어요.”
나룻배를 타고 학교를 다니기 번거롭다 보니 성수동이나 왕십리에 친척이 있으면 아예 친척 집에 머무르면서 학교를 다녔다. 토요일에는 나룻배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김 씨는 나룻배를 타지 않고 봉은사 앞에서 63번 버스를 이용해 성수동 중학교에 다녔다.
김 씨가 중학교에 들어가던 1973년 영동교(현 영동대교)가 개통된 것이다. 이후 대치동 주변은 영동 개발로 들썩였다. 1973년 ‘영동·잠실지구 신시가지 조성 계획’의 열기가 대치동에도 금방 미쳤다.
○ 이제 대한민국 사교육 1번지
“원래 살던 사람들이 새로 들어서는 아파트 공사장에서 현장 일도 많이 했지.”
1978년 한보그룹이 농지를 사들여 지은 4000여 채의 ‘은마아파트’는 대치동 아파트 신화의 시작이었다. 이후 속속 들어선 미도아파트, 선경아파트, 청실아파트에는 중산층이 자리 잡았다. 김 씨는 “‘미도(아파트)에서 돈 자랑 말고 선경(아파트)에서 학벌 자랑 말라’란 말이 있었다”며 “미도에는 장사로 돈을 좀 번 사람들, 선경에는 교수나 검사 같은 사람들이 들어왔는데 원주민들과 가깝진 않았다”고 전했다.
중산층과 명문 중고교의 유입은 대치동이 대한민국 사교육 1번지로 발돋움하는 결정적인 토대가 됐다. 은마아파트가 들어서던 해 종로구에 있던 휘문중·고가 대치동으로 옮겨왔다. 경기고, 숙명여중·고 등 강북의 명문 학교들이 강남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 씨는 “휘문고 앞에 종합학원인 종로학원이, 진선여고 앞에 한국학원이 들어오던 1991∼1992년 즈음 주변에 조그만 교습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전당포나 이발소, 양장점이 있던 아파트 옆 저층 상가 두어 칸을 빌려 집중 단과수업을 하는 학원들이 들어섰다.
대치동 은마아파트 사거리 일대의 상가가 통째로 ‘학원 상가’로 변한 1990년대 중후반 대치동은 전국 각지에서 유학을 오는 ‘전국구’로 부상했다. 김 씨는 “학원가가 가까운 은마아파트는 85% 이상이 자녀가 중고교생 때 이사를 왔다가 대학에 들어가면 나가는 전세 가구”라고 말했다.
대치동이 가장 붐비는 시간은 오후 6시와 오후 10시. 학생들이 하교 후 학원 수업을 들어갔다 나오는 시간이다. “이 동네 사는 사람들은 그때 차 절대 안 끌고 나와.” 그 시간대 은마아파트 사거리를 가로지르는 삼성로와 도곡로에는 자녀들을 마중 나온 부모들의 차가 2, 3줄씩 주차해 있다. 지난해 대치동에 등록된 학원 수는 1200여 개로 서울에서 가장 많았다.
학원 상가를 드나들던 학생들을 바라보던 김 씨가 말했다. “전깃불도 안 들어오던 때 여기로 시집와서 살고 계시는 어머님이 돌아가시면 나도 다른 동네로 이사 갈까 싶어, 지켜보고 있으면 숨이 막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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