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철 낚시 등 즐기러 몰리자… 어민들 “쓰레기 버리고 조업 방해”
보트 내리는 경사로 쇠사슬로 막아 곳곳서 마찰… 지자체도 난감
21일 오후 경북 영덕군 구계항. 휴가철을 맞아 소형 레저보트를 실은 트레일러를 끌고 바다를 찾은 시민들은 당황했다. 500kg이 넘는 무거운 동력보트를 띄우려면 바다와 이어진 완만한 경사로(슬립웨이)에서 차량을 후진해 트레일러를 물가에 댄 뒤 보트를 내려야 한다. 그런데 폭 6m 경사로의 초입에 차량이 접근할 수 없도록 두 개의 쇠사슬이 설치되고 끝부분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결국 시민들은 배를 대지 못해 쩔쩔매다가 항구를 떠났다.
구계항에서 북쪽으로 약 50km 떨어진 경북 울진군 직산항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폭 3m의 경사로에 자물쇠로 잠긴 쇠사슬이 걸려 있었다. 이날 낚시를 하려고 1t 소형 보트를 끌고 동해안을 찾은 우모 씨(61)는 결국 출항에 실패했다. 우 씨는 “오전부터 항구 세 곳을 돌았는데 다 막혀 있었다”며 “황금 같은 주말 하루를 이렇게 날리니 황당하다”며 돌아섰다.
본보 취재팀은 이날 휴가철에 레저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동해안 항구 6곳을 찾았다. 이 가운데 다섯 곳의 경사로는 자물쇠 장치를 비롯한 불법 구조물, 폐어선, 돌덩이로 가로막혀 있어서 레저를 위해 찾아온 사람들은 이용할 수 없었다. 서해안과 남해안도 사정이 비슷하다고 한다.
경사로를 막는 주체는 어민이다. 낚시 인구가 늘고 동력보트가 대중화돼 바다를 찾는 레저 인구가 늘어나자 어민들로서는 ‘바다 지키기’에 나선 것이다. 어민들은 항구를 열어놓으면 불편이 많다고 주장한다. 수십 명씩 몰려와 아무 데나 주차하고 쓰레기를 버리는가 하면, 바다 위에 작은 배들은 눈에 잘 띄지 않아 사고의 위험이 있다는 이야기다. 어민 박모 씨(47)는 “바다에서 먹고사는 사람들의 생계가 우선”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바다를 찾는 사람들은 어민들의 ‘텃세’가 지나치다고 맞섰다. 보트 낚시를 즐기는 박모 씨(44)는 “세금과 보험료를 내면서 배를 타는데 아예 출항을 막는 것은 곤란하다”고 말했다. 경사로가 막힌 항구를 피해 보트들이 한 곳으로 몰리는 것이 위험하다는 우려도 있다.
어민과 레저인들의 갈등이 커지고 있지만 지방자치단체와 정부는 대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영덕군, 울진군 등 지자체 관계자는 “양쪽 주장에 다 일리가 있어 중재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정부 관계자도 “섣불리 한쪽 편을 들기 힘든 상황”이라며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
이런 문제가 불거지는 근본적 이유는 급증하는 레저 수요를 인프라가 뒷받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6월 말 기준 동력수상레저기구 조종면허를 취득한 인원은 21만여 명으로 5년 전에 비해 약 47% 늘었다. 등록된 동력수상레저기구는 3만2000여 대에 이른다. 그러나 시설을 제대로 갖춘 마리나항(해양레저시설)은 전국적으로 대여섯 곳에 불과하다. 별도의 레저시설이 아닌 항구에 경사로가 있는 게 갈등의 주원인이다. 정부 관계자는 “해양 레저 인프라를 강화하기 위해 재정당국과 적극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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