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주세요” 신고하고도…가정폭력 피해 여성 90%, 남편과 계속 산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25일 19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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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사회]

“살려주세요!”

20일 112에 한 여성의 다급한 신고가 들어왔다. 출동한 경찰이 아파트 문을 두드렸지만 신고자의 남편은 “못 열어준다”며 10분 넘게 경찰과 대치했다. 경찰이 가까스로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자 거의 알몸 상태의 50대 여성이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신고자 A 씨였다. 그의 손과 발에는 테이프로 칭칭 감긴 흔적이 선명히 남아있었다.

A 씨는 몇 년 전에도 남편의 매질을 견디다 못해 두 차례 112 신고를 한 적이 있었다. 경찰은 상습적 폭력이라고 판단해 21일 남편에 대해 체포감금 등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하지만 법원은 영장을 기각했다. A 씨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 결정적이었다. 남편이 풀려나자 A 씨는 친정집으로 피신했다. 법원은 남편에게 접근금지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가 A 씨 거처에 막무가내로 들이닥치더라도 막을 방법이 마땅치 않다.

● 피해자 10명 중 9명, 가해자와 ‘계속 동거’


가해자를 격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구속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경찰청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가정폭력 사범 구속율은 0.8~1.4%에 그쳤다.

차선책으로 접근금지 등 긴급 임시조치가 필요하지만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가정폭력 사건에서 임시조치를 취하는 비율은 10건 중 1건(2013~2017년 평균)에 불과했다. 가정폭력 피해자 10명 중 9명은 사건 이후에도 가해자와 함께 살면서 지속적으로 피해 위협에 노출되는 것이다. 한국여성의전화 관계자는 “피해자를 고문 기술자와 한 방에 몰아넣은 것과 같다”고 말했다.

임시조치가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피해자들이 수사당국에 적극적으로 격리조치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땅한 주거지를 마련하기 어렵고 가정 파탄으로 자녀에게 부정적 영향이 갈까봐 망설이는 피해자가 많다. 접근금지가 풀린 뒤 보복에 시달릴 것이라는 우려도 영향을 미친다. 경찰 관계자는 “현행 가정폭력특례법이 가정 보호를 원칙으로 하고 있어 피해자가 임시조치를 요구하지 않으면 강제로 분리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여기에 가해자가 접근금지 명령을 어겨도 500만 원 미만의 과태료만 부과되기 때문에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지난해 임시조치 위반으로 과태료가 부과된 사례는 9건 뿐이었다.

반면 미국의 경우 가정폭력 신고가 접수되면 피해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가해자를 체포한다. 사안이 중하다고 판단되면 경찰이 가해자의 접근을 차단하고 피해자를 별도 시설에서 보호한다.

● 격리 조치 강화 법안 1년 째 계류 중


가해자를 철저히 격리하지 못해 참혹한 2차 피해가 빚어진 사례가 적지 않다. 5월 서울 관악구에서는 30대 남성이 동거녀를 폭행하고 불을 질렀지만 구속영장이 기각됐다. 이 남성은 영장 기각 뒤 40일 만에 동거녀를 찾아가 살해했다. 2016년 7월에는 60대 남성이 가정폭력 혐의로 두 차례 청구된 구속영장이 모두 기각된 뒤 아내를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두 건 모두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영장이 기각됐다.

실질적인 가해자 격리가 가능하도록 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가정폭력 사범이 긴급 임시조치를 위반할 경우 가해자를 즉시 체포하거나 형사처벌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담은 법률 개정안이 지난해 7월 발의됐지만 아직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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