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기업 2년 차 사원 노모 씨(26)는 올해 40도 가까운 무더위에도 긴바지를 고수한다. 신입사원이던 지난해 여름에 있었던 ‘안 좋은 추억’ 때문이다. 당시 노 씨는 ‘자유복장’이라는 회사 방침을 보고 감색 반바지에 흰색 셔츠를 단정히 입고 출근했다. 하지만 상사들은 노 씨를 보자마자 “복장이 그게 뭐냐”며 연이어 핀잔을 줬다. 부장은 “신입사원 교육에 신경 쓰자”며 노 씨의 상사들을 공개적으로 혼냈다. 이후 차장과 과장, 사수인 대리가 번갈아가면서 “눈치껏 좀 하자”며 노 씨를 질책했다.
#2. 서울 최고기온이 36.8도까지 올라갔던 24일 낮 12시. 점심시간을 맞아 서울시청 1층 로비로 남자 직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상의는 반팔 티셔츠를 입은 직원이 많았지만 바지만큼은 정장바지, 면바지, 청바지 모두 긴바지 일색이었다. 반바지 차림의 직원은 한 명도 없었다. 이따금 발목을 살짝 드러낸 9분 바지 정도가 눈에 띄는 노출이었다. 서울시 공무원 A 씨(43)는 “아무도 반바지를 안 입으니 나도 안 입는 것뿐”이라며 “상사들이 반바지 차림으로 출근하면 따라 입을 생각은 있다”고 말했다.
○ 유독 반바지만 안 되는 쿨비즈
덥고 습한 날씨가 지속되면서 시원한 업무복장을 뜻하는 ‘쿨비즈(Cool-biz)’에 이어 반바지나 샌들 등을 권하는 ‘슈퍼 쿨비즈’를 권장하는 공공기관과 기업이 늘고 있다. 서울시는 2005년부터 업무효율을 높이고 에너지를 줄이자는 차원에서 노타이 차림에 이어 반바지와 샌들을 허용하는 ‘시원 차림’을 권장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대기업도 임직원의 반바지 착용을 자율화했다.
서울시는 박원순 시장이 직접 반바지를 입고 패션쇼에 오르는 등 슈퍼 쿨비즈를 정착시키기 위해 애를 썼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서울시 관계자는 “시에서 나름대로 노력을 하는데 남자 직원들이 반바지만큼은 정말 잘 안 입는다”고 말했다.
다른 관공서와 기업에서도 남성 직원들은 ‘긴바지옥(긴바지+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반바지를 입으면 예의에 어긋나고 격이 떨어진다’는 고정관념에 갇혀 아무리 더워도 긴바지를 고수하는 것이다. 여성 직원들이 짧은 반바지나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샌들을 신는 것과 대비된다.
○ “긴바지옥” vs “반바지는 속옷 차림”
반바지 차림을 허용하는 슈퍼 쿨비즈가 정착하지 못하는 건 반바지에 대한 세대별 인식차가 극심한 탓이 크다. 실용을 중시하는 젊은 세대는 ‘반바지 입고 일 잘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반면 권위와 격식을 중시하는 기성세대는 반바지가 예절에 어긋난다고 여긴다.
이렇다 보니 반바지를 입고 싶어도 눈치를 보다 포기하기 십상이다. 이모 씨(30)가 근무하는 한 중견회사는 ‘여름철 간편한 복장을 권장한다’는 내부 공고를 올렸다. 이 씨는 “혹시 반바지를 입어도 되느냐”고 상사에게 물었다. 상사는 “긴가민가할 땐 안 하면 된다”고 답했다. 이 씨는 “회사에서 찍힐 바엔 땀 좀 흘리는 게 낫다”며 한숨을 쉬었다.
2030세대는 불만이 많다. 서울 강남의 한 대기업에서 일하는 4년 차 직원 이모 씨(30)는 “밖에 잠깐만 나가도 다리에 땀이 흐른다”며 “외근도 없는데 한여름에 긴바지를 입는 건 비효율”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50대 직장인들에게 반바지는 ‘회사에선 입을 수 없는 옷’이다. 디자인회사 대표 김모 씨(59)는 “반바지는 속옷처럼 느껴진다”며 “직책이 있는 만큼 속옷 차림으로 회사에 가는 건 부담”이라고 말했다.
중간관리자 세대인 40대 직장인들은 ‘젊은 직원들의 요구는 알지만 윗선의 눈치가 보인다’며 양쪽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한 대기업 계열사 차장 송모 씨(43)는 “부하 직원들이 ‘옷 좀 편하게 입게 해 달라’고 말하는 게 이해되지만 우리도 윗선 눈치를 봐야 하는 게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전문가들은 ‘반바지 근무’라는 문화가 정착 과정에서 과도기를 겪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상대방의 생각을 존중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서울대 의류학과 남윤자 교수는 “아래 직급에 있는 다른 사람이 반바지를 입더라도 불편한 시선을 보내지 않고 서로의 복장을 존중해야 실용적인 쿨비즈 문화가 정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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