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피플 in 뉴스]‘에린 브로코비치’와 BMW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15일 03시 00분


법률회사 말단 직원인 에린 브로코비치(사진)는 어느 날 서류를 정리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의료 기록에 의문을 갖고 끈질기게 추적합니다. 그 지역에서 전력 사업을 하는 대기업 PG&E사의 공장이 크롬 성분이 포함된 오염물질을 대량 방출해 수질오염 등으로 주민들이 질병에 신음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브로코비치는 진실에 대한 집념으로 사람들을 설득해갔고, 결국 마을 사람들의 동의를 받아 소송을 진행합니다. 4년여의 시간이 지난 뒤 수질오염의 원인을 제공한 PG&E사에 미국 법정 사상 최고 배상액인 3억3300만 달러(약 3700억 원)를 지불하라는 판결이 내려집니다. 실제 손해보다 훨씬 큰 징벌적 배상금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2000년)의 내용입니다. 원래 손해배상에 관한 민법 원칙은 가해자가 고의 또는 과실로 타인에게 손해를 가했을 때 손해에 해당하는 금액만을 금전으로 배상합니다. 그러나 가해자가 문제를 알면서도 ‘고의로’ 손해를 가한 경우 단순 실수와는 달리 취급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있어 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입니다. 선진국들은 진작 도입했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걸음마 단계입니다.

최근 자동차 화재 사고가 연일 뉴스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올해 들어 주행 중 불이 난 BMW 차량은 40대에 육박합니다. BMW 소유자들은 자신의 차가 여기저기서 기피 대상이 돼 주차마저 거부당하자 비싼 돈 주고 BMW를 샀더니 Bus(버스), Metro(전철), Walk(걷기) 등 대중교통만 이용하게 됐다고 푸념합니다. BMW 측은 사고가 반복되는 동안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버티다 정부가 조사에 착수하자 뒤늦게 결함을 인정하고 10만 대 리콜을 결정했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정부의 기술자료 요구에 응하지 않고 리콜 계획서를 부실하게 작성하는 등 소극적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2013년 일본 도요타는 자동차 가속 장치 결함으로 사고가 나자 리콜과 소송합의금, 배상금 등으로 총 40억 달러(약 4조7000억 원)에 이르는 금액을 지급했습니다. 이번 BMW 화재와 유사한 사고가 발생한 미국이나 독일에서는 BMW가 선제적으로 130만 대 리콜을 실시했습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와 집단소송제가 있느냐에 따라 제조업체의 대응이 확연히 다릅니다.

집단소송제는 피해를 입은 개인 또는 일부가 가해자를 상대로 소송을 하면 다른 피해자들도 별도 소송 절차 없이 그 판결로 피해를 구제받을 수 있는 제도입니다. 우리나라는 2005년부터 주가조작, 분식회계 등 증권 분야에만 제한적으로 집단소송제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건이 매우 까다로운 편이라 선진국처럼 적용 분야를 폭넓게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제조물책임법에 따라 제한적으로 적용합니다. 하지만 배상액이 손해액의 3배에 불과해 실효성이 낮습니다. 더욱이 제조물 결함으로 ‘생명 또는 신체에 중대한 손해를 입은 경우’에만 해당돼 이번 BMW 사건에 적용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선진적 시장 질서를 구축하려면 기업의 반사회적이고 고의적 가해 행위를 근절하고 소비자 권익을 철저히 보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징벌적 손배배상제와 집단소송제의 실질적 확대 여론이 커지고 있습니다.

박인호 용인한국외대부고 교사
#에린 브로코비치#bm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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