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 재배 29년을 하면서 이렇게 더운 여름은 처음입니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는 농사일을 쉬어야 할 정도죠. 이런 뙤약볕 아래서 사과도 타들어가고 있어요. 사람으로 치면 화상을 입는 거죠.”
16일 방문한 경기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 소야사과농장 함유상 대표(50)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이 지역은 산으로 둘러싸인 조용한 농촌 마을이지만 계속된 폭염 탓에 이중, 삼중고를 겪고 있었다.
이날 농장 주변은 각종 새와 레이저 빔 소리로 귀가 먹먹했다. 과일에 피해를 입히는 까치 까마귀 직박구리 등 야생조류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녹음한 소음을 하루 종일 틀고 있는 거였다. 농장 곳곳에는 매의 형상으로 만든 연까지 날리며 새들의 접근을 막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포천은 이날도 아침부터 30도가 넘는 무더위가 계속됐다. 아침부터 내리쬐는 햇볕 속에 사과나무 곳곳에는 누렇게 변색된 사과들이 떨어져 있었다. 사과들은 초록색을 띠지만 햇볕을 과하게 받으면 하얗게 변한 뒤 누렇게 바뀐다. 우리가 구입하는 빨강색 사과와는 전혀 달라지는 것이다.
함 대표는 올해 봄 쌀쌀한 날씨 때문에 사과 꽃이 피지 않는 냉해 피해를 입은 데 이어 여름에는 폭염이 한달 넘게 지속되면서 사과 변색이 심해지는 등 재배하는데 애를 먹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9월 추석 상에 올릴 명절 사과(홍로) 상당수가 색깔이 변하고 당도가 떨어졌습니다. 통상 초록 빛깔을 보여야 정상인데 뜨거운 햇볕에 데여 변질된 셈이죠. 색깔이 변하면 껍질이 두꺼워지고 면역력이 약해져 병에 잘 걸립니다. 심하면 사과 속이 썩어 버려야 합니다. 여기에 새들까지 먹이를 찾아 농장을 습격해 삼중고를 겪고 있습니다.”
함 대표와 함께 둘러본 사과 농장은 예상보다 피해가 컸다. 사과나무 위쪽에 자라는 사과들 대부분 사과 윗부분이 햇볕에 그을려 누렇게 변색돼 있었다. 일부는 병균이 침투해 시커멓게 구멍이 뚫려 있기도 했다. 일부 사과나무는 밑둥이 심하게 파헤쳐져 있었다. 이 일대에 서식하는 멧돼지 떼가 내려와 사과와 땅 속의 지렁이를 먹고 있기 때문이다. 함 대표는 “멧돼지는 야행성 동물인데 마음대로 밀렵도 할 수 없는 상태다. 엽총을 빌릴 수 있지만 저녁 이전에 반납해야 해 실효성이 없다”고 토로했다.
함 대표의 농장은 약 4만6280㎡(1만3000평) 규모로 홍로와 부사를 주로 재배하고 있다. 올해 사과 수확량이 줄었지만 주민 15명을 고용하며 인건비 부담은 더 늘었다. 더 큰 문제는 폭염이 계속되는데 비마저 내리지 않는다는 것. 함 대표는 관수시설을 마련해 사과나무에 지하수를 조금씩 공급하고 있지만 그마저 수량이 부족해 나무들이 말라가고 있다. “며칠 전 소나기가 내린 것 외에 비 소식이 없었습니다. 인공적으로 물을 주는 데는 한계가 있어 정말 비라도 많이 내려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추석(9월 24일)을 앞두고 5kg 당 3만~4만 원에 거래되던 사과가 올해는 1만 원 정도 더 오를 것으로 보인다. 함 대표는 “추석 선물용 빨간 사과는 출하량이 예전보다 20~30%가 줄어 가격이 약간 오르겠지만 태양에 약간 데인 B급 사과는 예년과 비슷한 가격이 될 것”이라며 “다만 과일 가격이 오르면 소비자들이 육류 쪽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어 사과 판매가 줄어들까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올해 이례적인 폭염으로 과일은 물론 콩 옥수수 깻잎 배추 등 야채 농사가 흉년이 되고 있다. 실제로 포천 일동 일대 깻잎 파를 가꾸는 밭에선 먼지가 풀풀 날렸다. 야채들은 생기를 잃은 채 늘어진 모습이었다. 한 주민은 “무더위 속에 비마저 거의 내리지 않아 야채들에 물을 주지 못하고 있다”며 “이대로라면 사실상 올해 농사는 포기해야 하는 셈”이라고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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