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나 유명인의 열애설이 터질 때마다 회자 되는 것 중 하나가 ‘성지글’이다.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기 전, 현 상황을 정확히 예견했던 글이 뒤늦게 관심을 받는 것을 뜻한다. 게시될 당시만 해도 신빙성을 의심받던 글들은 그제야 누리꾼들의 ‘성지순례’ 행렬을 불러일으킨다.
예술작품도 이런 역할을 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메르스가 터지기 2년 전인 2013년 개봉했던 영화 ‘감기’는 감염자 확산, 정부의 안일한 대처와 맞물리며 메르스로 인한 혼란을 예고했다는 평을 받았다. 인수공통전염병이 확산되며 무정부 상태로 전락한 도시를 그려낸 정유정 작가의 베스트셀러 ‘28’ 역시 같은 시기에 출간됐다. 간호사 출신 작가의 꼼꼼한 취재 끝에 나온 상상력이었겠지만, 당시 사람들이 느꼈던 무질서와 공포감을 실감나게 예견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에도 여러 창작물이 화제가 됐다. 영화 ‘내부자들’(2015) ‘아수라’(2016)에 묘사된 거대 권력과 기업의 유착, 은밀한 뒷거래는 개봉 당시만 해도 영화적 과장법 정도로 치부됐다. 하지만 실제로는 현실이 더 영화 같다는 충격을 줬다. 드라마 ‘밀회’(2014)도 빼놓을 수 없다. 실력이 부족한데도 어머니의 영향력으로 명문대에 들어가 학점특혜를 받는 극중 여학생은 몇 년 뒤 폭로된 정유라의 이화여대 부정입학 사건과 놀랍게 일치해 재조명됐다.
작가들의 이런 예측신공은 올해도 예외가 아니다. 얼마 전 국민연금 개편 자문안이 공개되자 여론이 그야말로 들끓었다. 뜨끔한 정부가 확정안이 아니라고 진화에 나섰을 만큼, 기금고갈을 막기 위해 지급시기를 68세로 상향 조정하는 안에 대한 거부감은 거셌다. 온라인에는 ‘아예 사망 이후 지급하라’거나 ‘차라리 100세까지 살면 몇 억 준다고 해라’는 등의 조롱이 넘쳤다.
이런 반응은 현재 상황을 미리 예견한 듯한 소설을 떠올리게 했다. 올해 5월 출간된 박형서 작가의 장편 ‘당신의 노후’다. 이 소설은 국민연금공단이 기금고갈을 막기 위해 비밀 조직을 꾸리고 연금 수령대상자들을 암살하는 가까운 미래를 다룬다. 공단에 낸 금액보다 많은 돈을 수급하는 노인들을 ‘적색리스트’로 분류해 암살하고 사고사로 위장하는 것이다. 출간 때만 해도 ‘황당하지만 재미있는 상상력’ 정도의 평이 나왔지만 이제와 보니 마치 국민연금에 대한 현재의 불신을 정확히 반영해 쓴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소설이지만 소설 같지 않다”는 독자평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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