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엔 변변한 기업 없어 대학이 버팀목인데” 상인들 한숨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27일 03시 00분


‘대학 5곳 중 4곳이 정원감축’ 비상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죠.”

23일 강원 원주시에 있는 한라대 남재성 기획처장은 교육부에 제출한 보고서를 만지작거리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기획처장 사무실 책장과 책상은 이미 말끔히 정리돼 있었다. 그는 이날 오후 2시 ‘대학 살생부’로 불리는 교육부의 대학 기본역량 진단 결과가 나오자 보직 사퇴 의사를 밝히고 짐을 쌌다. 한라대는 이번 평가에서 자율개선대학에 들지 못했다. 자율개선대학에서 탈락한 일반대(4년제) 40곳은 앞으로 정원을 줄이고 정부의 재정 지원과 학자금 대출이 제한된다.

○ 원주 5개 대학 중 4곳이 정원 감축해야

원주시는 대학 기본역량 진단 결과의 직격탄을 맞았다. 강원도 소재 4년제 대학 8곳 중 5곳이 원주에 있다. 이 중 강릉원주대 원주캠퍼스를 제외한 경동대 메디컬캠퍼스, 상지대, 연세대 원주캠퍼스, 한라대 등 4곳이 정원 감축 대상에 포함됐다. 해당 대학뿐만 아니라 지역사회도 충격을 받았다.

이 중 한라대는 역사가 짧아 인지도는 낮지만 모기업인 한라그룹의 탄탄한 지원에 힘입어 빠르게 성장했다. 강원도 거주 신입생 비율이 43.6%로 강원도 대학 중 가장 높다. 졸업생의 22%가 한라그룹 계열사나 협력사 등 지역 기업에 취업한다. 남 처장은 “교육부가 지역별, 대학별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인위적 구조조정에 나선 것 같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원주에서 규모가 가장 큰 연세대 원주캠퍼스도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올 6월 1단계 평가에서 ‘예비자율개선대학’에서 탈락한 뒤 부총장 이하 보직교수가 일괄 사퇴하며 2단계 평가에 사활을 걸어온 만큼 충격이 더 커 보였다. 이달 초 취임한 윤영철 부총장은 “원주캠퍼스 의공학부는 신촌캠퍼스엔 없는 학과로, 원주 의료기기 테크노밸리에 인재를 공급하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대학의 정원을 줄이면 대학뿐 아니라 지역경제에 타격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 정원 감축 시 학내 갈등 불 보듯

이 대학들은 당장 다음 달 시작하는 수시 모집부터 걱정이다. 부실 대학이라는 낙인 효과로 수험생들이 지원을 기피할 가능성이 크다. 이번 평가에서 ‘재정지원제한대학Ⅰ’ 등급을 받은 상지대 관계자는 “신입생 수 감소가 등록금 수입 감소로 이어져 ‘빈곤의 악순환’을 가져올 수 있다”며 “평가 결과가 나오기 전부터 재학생과 학부모들이 수시로 평가 결과를 물어왔다. 재학생 중 이탈하는 학생도 나올 것”이라고 우려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걱정은 정원 감축이다. 대학별로 앞으로 3년간 10∼35% 정원을 줄여야 한다. 정원 감축 논의 과정에서 어느 학과에서 몇 명을 줄이느냐를 두고 학내 갈등이 터져 나올 개연성이 매우 크다. ‘빈곤의 악순환’에 ‘학내 갈등 폭발’까지 더해지면 해당 대학들은 더 빠르게 내리막길을 걸을 수 있다.

이에 연세대는 본교 총장 직속 원주혁신위원회를 통해 향후 대책을 논의할 계획이다. 한라대 역시 이번 주에 전체교수회의를 열기로 했다. 상지대는 같은 재단이 운영하는 상지영서대와의 통폐합을 통한 정원 감축을 추진하고 있다. 다만 원주 외에도 강원 고성과 경기 양주에 캠퍼스가 있는 경동대의 경우 정원 감축 충격이 상대적으로 덜할 것으로 보인다.

○ 지역 경제에도 ‘빨간불’

원주 인구는 34만 명이다. 서울 경기 등 수도권과의 접근성이 좋아 인구 규모에 비해 대학이 많은 편이다. 변변한 공장이나 회사가 없고 관광자원이 많지 않은 원주에서 대학은 지역 경제를 지탱하는 한 축이다. 원주 소재 대학 5곳의 재학생은 총 2만3000여 명으로 앞으로 3년 뒤 정원 감축이 마무리되면 1만9000명대로 줄어든다.

대학가 인근 상인들은 “걱정스럽다”고 입을 모았다. 연세대 원주캠퍼스 정문 맞은편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어지영 씨(44·여)는 “손님의 90%가 학생이라 방학 때는 대다수 가게가 문을 닫는다. 오늘도 테이블 하나를 받았다”며 “이런 와중에 학생이 더 줄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했다. 실제로 이날 캠퍼스 인근에는 문을 연 가게보다 문을 닫은 가게가 더 많았다.

이곳 주변 원룸촌에는 공실이 200개를 넘는다. 부동산중개업소를 운영하는 박창덕 씨는 “이미 초과 공급이다. 6월 예비자율개선대학에서 탈락한 뒤 임대사업자들이 매물을 내놓기 시작했다”고 우려했다.

이는 원주만의 얘기가 아니다. 자율개선대학에서 탈락한 전국 40개 대학의 재학생은 20만 명이 넘는다. 이들은 지방 상권의 버팀목이다. 정원 감축에 이어 폐교로 이어지면 학교 주변 상권은 아예 사라진다. 3년 전 대학평가에서 최하 등급을 받은 대학 5곳 중 3곳이 문을 닫아 폐교는 먼 미래가 아니다. 교육부는 자진 폐교하는 대학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학생과 교직원 피해를 줄이는 데만 초점이 맞춰져 있어 지역경제는 충격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원주=김호경 kimhk@donga.com·박은서 기자
#대학 5곳 중 4곳#정원감축#지역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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