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진→좌회전’ 갑자기 바뀐 차로… 대처능력 떨어진 노인들 ‘끼익’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9월 4일 03시 00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어디에]<2> 노인 친화적 교통 인프라 부족


지난달 30일 서울 서초구 염곡동의 도로교통공단 서울지부. 화물트럭부터 시작해 시내버스까지 50년 가까이 운전대를 잡아온 최병수 씨(80)는 ‘운전능력 검사기기’ 앞에서 “젊은 시절 눈 감고 서울 시내를 운전했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하지만 고령자를 위한 ‘인지기능 검사’가 시작되자 말수가 줄고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 왕년의 ‘베스트 드라이버’도 쩔쩔 매

인지기능 검사는 짧은 시간 안에 교통표지판을 구분해 내거나 경로나 방향을 기억하는 정도를 측정해 간접적으로 운전이 가능한 상태인지 확인하는 검사다. 최 씨는 익숙하지 않은 기기와 짧은 답변 시간을 탓하며 검사 내내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최 씨의 최종 점수는 54점. ‘낙제점’인 42점을 간신히 넘겼다.

하지만 총 5개 평가항목 가운데 3개 항목에서 3등급 이하 점수를 받았다. 특히 빠르게 옆으로 지나가는 숫자를 기억하는 ‘횡방향 동체 추적검사’는 4등급, 표지판이 가리켰던 방향을 알아맞히는 ‘방향표지판 기억검사’는 최하 등급인 5등급이 나왔다.

검사를 진행한 도로교통공단 정월영 교수는 “점수가 낮다고 해도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거나 운전을 못 하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등급이 낮으면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의미여서 운전대를 잡지 않기를 권고한다”고 말했다.

도로 운전 상황을 재현한 ‘시뮬레이터’ 검사에서도 최 씨는 고전했다. 특히 차로 가운데를 달리거나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호소했다. 결국 30대 기자보다 2배 넘는 급가속, 급정지 횟수를 기록했다. 최 씨는 “세상에서 운전 하나는 자신 있었는데 지난해부터 시력이 떨어져 운전을 자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 노인 친화적 교통 인프라 부족

올해 6월 말 기준 65세 이상 고령 운전자는 294만5737명으로 6년 전인 2012년에 비해 약 130만 명이 늘었다. 고령 운전자 비율은 9.2%로, 전체 운전자 10명 중 1명이 노인이다. 고령 운전자가 낸 교통사고는 2012년 1만5190건에서 지난해 2만6713건으로 75.8%나 급증했다.

이처럼 고령 운전자 사고가 급증한 데엔 고령 운전자에게 친화적이지 않은 국내 교통 체계가 한몫하고 있다. 도로교통공단에 따르면 고령자들이 운전 시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은 교차로에서의 좌우 회전과 진로 변경이다. 차를 회전하려면 주변 차량의 속도와 거리, 신호, 보행자 등 다양한 요인을 짧은 시간 안에 판단해야 한다. 나이가 들면 많은 정보를 한 번에 처리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교통과학연구원 최은진 연구원은 “국내 도로는 직진 차로가 갑자기 좌회전 전용 차로로 바뀌는 등 도로 구조가 복잡해 고령자에게 몇 배 부담이 된다”고 말했다.

○ 운전면허 반납 시 인센티브 도입 필요

전문가들은 지난해 이미 고령사회(65세 이상이 전체 인구의 14% 이상 차지)에 진입한 데 이어 7년 뒤인 2025년 초고령사회(65세 이상이 20% 이상 차지)에 들어서는 만큼 고령 운전자를 위한 교통 시스템을 시급히 갖춰야 한다고 지적한다. 일본은 2010년 교통표지판 글자 사이 여백을 넓혀 표지판 판독 거리를 10% 향상시켰다.

국내 교통표지판의 경우 방향을 나타내는 글자(지점명) 크기가 22cm로, 도로명(33cm)에 비해 작다. 정부는 도로명보다 운전자에게 더 유용한 정보인 지점명을 30cm 안팎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고속도로처럼 어두운 곳에 있는 표지판에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을 설치하면 야간 운전을 힘들어하는 노인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신호등을 한 개 차로마다 설치하면 교차로 사고를 줄일 수 있다. 고령 운전자들이 멀리서도 자신이 진입해야 하는 차로와 신호 상황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최 연구원은 “고령 인구가 많이 사는 지역은 비보호 좌회전을 없애고 좌회전 신호를 주면 사고 예방에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

고령 운전자들이 운전 능력이 떨어지면 스스로 운전대를 놓게 하는 정책도 필요하다. 국내에서는 2015년부터 운전면허 자진 취소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지난해 한 해 동안 3700여 명이 스스로 면허를 반납했다. 특히 부산시는 올해 7월부터 면허를 자진 반납한 고령 운전자에게 교통비 지원과 식당 할인 등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있다. 이에 7월에만 부산에서 1509명이 면허를 반납했다.

정월영 교수는 “올해부터 고령 운전자가 차량에 부착할 수 있도록 ‘실버 마크’를 제작해 배포하고 있다”며 “초보 운전자를 배려하듯이 고령 운전자를 이해하고 기다려줄 수 있는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철중 기자 tnf@donga.com
#노인#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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