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링~” 메신저 메시지가 도착했다. 열어보니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듯 쏟아지는 정오의 찬란한 햇살 사진이었다.
큰 애들과 함께 한강둔치 나들이를 간 남편이 보낸 것이었다. 아침 일찍 텐트와 야영의자까지 잔뜩 챙겨 나가더니 다행히 나무 그늘 아래 상석에 자리를 잡은 모양이었다. “부럽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이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기나긴 폭염이 언제였냐는 듯 공기도 선선했다.
‘세상에 이 좋은 날 나는 집에 틀어박혀 있어야 한다니.’ 기운이 쭉 빠졌다. 물론 남편이 나간 건 나와 갓난아기를 위해서였다. 큰 애들이 집에 있으면 아무래도 막내를 온전히 돌보기 어렵고 아기도 깊게 잠을 잘 수 없다. 남편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지만 그래도 한편으로 속상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나도 이 화창한 날 아이들과 함께 바깥나들이 나가고 싶었다.
신생아 엄마의 매일은 반강제 감금생활과 다름없다. 물론 아이를 남에게 맡긴다면 잠깐씩 나갔다 오는 건 가능하다. 하지만 그래봐야 시한부 외출이다. 생후 한두 달까지 아기는 수시로 엄마 젖을 찾기 때문이다. 특히나 ‘완모(분유는 주지 않고 모유만 주는 것)’를 할 경우에는 1~2시간에 한 번 아기에게 젖을 물려야 한다. 잠깐 아기를 맡기고 바깥일을 보고 오려 해도 시간 잡기가 쉽지 않다.
지난주 평일에 하루 쉬는 남편과 바람이라도 쐴 겸 집 앞 식당에 외식을 하러 나갔다. 아기는 잠시 산후조리사님께 맡겼다. 가급적 정오까지 수유를 하고 아기가 자는 1~2시간 내 식사를 할 작정이었지만, 수유시간을 제대로 조율하지 못해 다소 애매한 오전 11시에 집을 나서야 했다. 그나마도 먹는 내내 조리사님으로부터 “아기가 깼다”는 연락이 오지 않을까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에 식사를 즐길 기분이 나지 않았다. 남편은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피자 한 판을 다 먹은 뒤 “어니언링(양파튀김)도 하나 시켜 먹을까?”고 했다. “그러든가”하고 답은 했지만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내 불편한 기색을 느꼈는지 결국 신랑은 추가 메뉴를 시키지 않고 일어섰다.
이런 생활의 반복에 많은 여성들은 산후우울증에 걸린다. 나 역시 첫 아이 때는 종일 아이에 묶인 삶이 무척 당황스럽고 견디기 어려웠다. 낯선 동네에서 딱히 나갈 데도 없고 만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고 ‘방콕(방에 콕 박힌)’ 생활이 한가한 것도 아니었다. 2시간에 한 번씩 수유하고 아기 기저귀를 갈고 토한 옷을 갈아입히고 칭얼대는 아기를 안아주다 보면 금세 저녁이 됐다. 아기 목욕을 시키고 다시 젖을 물리면 어느덧 밤이었다. 별로 하는 것도 없는 것 같은데 하루가 어찌나 훌렁 가는지.
특히 첫째가 태어났을 때는 남편도 바빴던 시기였다. 육아를 분담하는 건 기대하기 어려웠다. 신혼집도 친정에서 멀어 친정엄마나 친구가 찾아오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때만 해도 운전 초보라 친정집(약 1시간 거리)까지 아기를 데려가는 것도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말 그대로 ‘독박육아’였다.
자칫 우울증에 걸리기 쉬운 상황에서 나는 나 나름의 해법을 찾았다. 비록 집에만 있을지언정 뭔가 몸과 마음이 바쁠 일들을 만드는 것이다. 가장 좋은 건 집안일이었다. 나이 들었을 때 산후풍이 올 수 있기 때문에 꼼짝 말아야 한다는 어르신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난 ‘정신적 산후풍’을 극복하기 위해 청소와 정리, 요리를 시작했다. 매일 같이 방을 쓸고 닦고, 집안 인테리어도 이렇게 저렇게 바꿔봤다. 인터넷에서 각종 요리법을 찾아 생전 해본 적 없는 제과제빵에도 도전했다. 그러다 보면 은근히 시간이 잘 갔다.
두 번째 방법은 독서였다. 가까운 도서관에서 매주 책 서너 권을 빌렸다. 주로 수유 중간 중간 졸지 않고 읽을 수 있는 재미있는 소설류였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더불어 뭔가 정신이 충만해지고 있다는 만족감도 들었다. 2~3일에 한 권을 독파했다. 아이가 잘 자줄 때는 하루 한 권씩 읽을 때도 있었다. 단언컨대 첫째 육아휴직 기간은 살면서 내가 가장 많은 책을 읽은 시간이었다.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이란 것도 처음 시작했다. 이전에는 아기 엄마들이 이른바 ‘맘 카페’라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들어가 수시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보며 ‘왜 저런 쓸 데 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할까’ 싶었다. 한데 같은 아기 엄마가 되고 보니 이해가 갔다. 그곳은 집에 갇힌 엄마들에게 소통의 장, ‘아고라(agora)’ 같은 곳이었다. 당시 나는 주변 친구들이나 회사 선후배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일찍 출산을 한 편이라 육아이야기를 터놓고 할 수 있는 상대가 없었다. 맘 카페에 들어가 남들의 고민을 보고 댓글을 달다 보면 마치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남들 고충 글을 읽으면 ‘나만 힘든 건 아니구나’하고 위안도 받았다.
이런 나만의 ‘산후조리’ 덕에 우울증 없이 세 번의 육아를 잘 치러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런 생각도 든다. 왜 이런 외로움과 스트레스를 엄마 스스로 극복할 수밖에 없었을까? 산전 임신부나 산후 영·유아를 지원하는 정책들은 많다. 그런데 정작 임신과 출산의 주인공인 산모들의 산후 건강에 대한 지원책은 무엇이 있는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여성은 아이를 낳는 소임을 다한 순간부터 국가의 관심 밖이 되는 것일까.
아이들과 나들이를 나갔던 남편은 저녁이 되어서야 파김치가 되어 돌아왔다. “힘들다”며 털썩 주저앉는 남편을 보니 그도 자기 나름의 산후풍을 겪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남편도 자기만의 해소법을 찾았을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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