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어떻게 보내느냐고요? 정말 아무것도 안 해요. 차례도 지내지 않고…. 아버지 모시고 가족들이랑 근교로 나들이나 갈까 해요.”
19일 서울 경복궁 옆 카페에서 만난 이치억 성균관대 유교철학문화컨텐츠연구소 연구원(42·사진)은 추석 계획을 묻자 싱긋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 연구원은 퇴계 이황의 17대 종손이다. 10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이황이 누군가? 조선 성리학의 기초를 세운 인물 아닌가. 그런 뼈대 있는 가문의 자손이 차례를 안 지낸다고?
“추석엔 원래 차례를 지내는 게 아니에요. 추석은 성묘가 중심인데, 저희는 묘가 워낙 많아 일부는 (벌초) 대행을 맡겼어요. 그리고 성묘는 양력으로 10월 셋째 주 일요일을 ‘묘사(墓祀)일’로 정해 그때 친지들이 모여요. 그러니 추석은 그냥 평범한 연휴나 다를 게 없죠.”
종갓집답지 않은 이 오붓한 추석은 십수 년 전 이 연구원의 부친이자 이황의 16대 종손인 이근필 옹(86)의 결단에서 시작됐다. “아버지는 무척 열린 분이세요. 예법을 그냥 답습하지 않고 그 의미가 뭔지 계속 고민하셨죠. 집안 어르신들도 변화를 거부해선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계셨고요.”
퇴계 종가의 제사상은 단출하기로도 유명하다. ‘간소하게 차리라’는 집안 어른들의 가르침 때문이다. 한 때는 1년에 20번 가까이 제사를 지냈지만 현재는 그 횟수가 절반 이하로 줄었다. “만약 집안 어른이 자손들에게 조선시대의 제사 형식을 고수하라고 한다면 그 제사가 유지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자손들이 등을 돌려 아예 없어지고 말 거에요. 예(禮)란 언어와 같아서 사람들과 소통하면 살아남지만, 그렇지 못하면 사라지고 말죠. 시대와 정서에 맞는 변화가 필요해요.”
제사가 있을 때는 이 연구원도 부엌에 들어간다. “음식 만들기엔 소질이 없지만 설거지는 제가 해요(웃음).” 할아버지, 할머니는 설거지를 하는 증손을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단 한번도 뭐라 한 적이 없었다.
“원래 예에는 원형(原型)이 없어요. 처음부터 정해진 형식이 있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마음을 따라 하다보니 어떤 시점에 정형화된 것이죠. 우리가 전통이라고 믿는 제사도 조선시대 어느 시점에 정형화된 것인데 그게 원형이라며 따를 필요는 없다고 봐요. 형식보다 중요한 건 예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에요.”
그는 “우린 평소 조상을 너무 잊고 산다”며 “명절만이라도 ‘나’라는 한 사람의 뿌리인 조상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 가족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 아내도 남편도 힘든 명절은 그만…“과일-송편으로 충분” ▼
‘하아! 이 망할 놈의 유교 같으니라고….’
이 땅 위의 한국인들은 추석 때마다 마음 한 켠으로 조그맣게 이런 말을 읊조렸을지 모른다. 몇 시간 동안 막히는 고속도로를 뚫고 도착한 선산에서 윙윙대는 벌들과 싸워가며 예초기를 밀 때, 언제나 친정은 뒷전으로 하고 시댁부터 찾아가 추석의 하이라이트를 보내야 할 때, 얼굴도 모르는 남편의 조상님을 위해 환갑이 넘어서까지 차례상을 차려야 할 때, 이들은 생각한다. ‘유교 때문에 내가 죽겠다….’
초등학생인 시동생을 ‘도련님~’하고 불러야 하는 며느리는 마치 몸종이 된 기분이 든다. 추석이 끝난 뒤 분노를 쏟아내는 아내를 보는 남편들도 생각한다. ‘어머니, 왜 저를 유교 문화권에 낳으셨나요….’
하지만 유교전문가들은 억울하다. 한국인에게 유교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현실이. 사실 조상님들의 ‘본심’은 그게 아닌데 본 뜻을 살리지 못한 잘못된 예법이 중구난방으로 전해져 마치 무조건 따라야 할 형식처럼 돼 버렸단 것이다. 조상을 공경하며 가족 모두 화목한 추석이 되기 위한 우리의 예(禮)는 무엇일까. 동아일보가 창간 98주년을 맞아 진행한 ‘새로 쓰는 우리 예절 신예기(新禮記)’ 시리즈 속에서 답을 찾아봤다.
▽추석 차례, 안 지내도 그만=본래 유교에서는 기제사(고인이 돌아가신 날 지내는 제사)만 지낼 뿐 명절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차례상 문화는 명절 날 자손들만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게 죄송해 조상께도 음식을 올리면서 생겼다. 여기에 조선 후기 너도 나도 양반 경쟁을 벌이면서 차례상이 제사상 이상으로 복잡해졌다는 것. 집안 전통상 차례 지내기가 관례라면 과일과 송편으로도 충분하다는 설명이다.
▽전 부치다 싸우면 바보=명절 기간 최고로 힘든 노동 중 하나는 ‘전 부치기’다. 보통 차례상에 올리기 위해 만드는 경우가 많다. 유교전문가들에 따르면 이는 잘못 전해진 예법의 대표적 예다. “제발 제사상에 전 좀 올리지 마세요. 유교에서는 제사상에 기름 쓰는 음식 안 올려요. 그건 절(사찰)법이라고요. 전 부치다 이혼한다는 데, 조상님은 전 안 드신다니까요.” (방동민 성균관 석전대제보존회 사무국장)
▽제사상 과일 위치, 집집마다 달라요=제사상을 차릴 때 흔히 ‘홍동백서(붉은색 음식은 동쪽, 흰색 음식은 서쪽에 놓음)’라는 말을 쓰지만 이는 정해진 게 아니다. 예서에는 ‘과일’이라고만 나와 있을 뿐 과일의 종류나 놓는 위치를 규정하지 않고 있다. 제사상 차림은 가가례(家家禮·각 집안마다의 예법)에 따르면 된다.
▽장남 혼자 제사 책임? 오해에요=장남만 제사를 지내야 한다거나, 음식은 한 집이 책임져야 한다거나, 여자는 음식만 만들 뿐 제사상에 절을 올려서는 안 된다는 것 모두 잘못 전해진 관념이다. 과거 조상들은 형제마다 각자 음식을 준비해오거나 제사 일부를 나눠 맡는 ‘분할봉사’를 했다. 종갓집에서는 지금도 제사 때 반드시 두 번째 술잔을 맏며느리에게 올리게 해 여성의 존재를 존중한다.
▽명절 때 방문 순서 번갈아 가면 어때요=직장인 신재민 씨(39)는 “결혼 초 명절 때마다 늘 우리집(시댁)부터 먼저 가는 관행 때문에 아내 불만이 많았다”며 “몇 년 전부터 한 해씩 친정과 번갈아 먼저 가기로 했는데 서로 만족한다”고 말했다. 양가 중 자녀가 한 명 뿐이거나 배우자와 사별한 경우 등 좀 더 외로운 부모 쪽을 먼저 찾아 배려하는 것도 좋다.
▽임신부·난임부부 각별히 배려해야=추석 때 만난 친지 가운데 임신부 혹은 난임부부 등 특별한 상황의 가족이 있다면 말과 행동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임신부의 배를 함부로 만지거나 ‘딸이 최고’ 혹은 ‘아들이 최고’ 등 왈가왈부하는 것은 실례가 될 수 있다. 아이가 없는 부부에게 자꾸 출산 계획을 묻거나 ‘불임엔 뭐가 좋다더라’ 식의 조언도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명절 때 가족여행, 서로 배려해야=만약 추석 연휴에 부모님·친지 등과 가족여행을 계획 중이라면 여행 중 서로에게 ‘고맙다’ ‘수고한다’ ‘즐겁다’는 말을 많이 하면 좋다. 부모님에게 아이를 맡기고 젊은 부부만 관광을 다닌다거나 ‘이 코스 누가 짰냐’, ‘음식이 별로다’, ‘애 엄마 수영복이 그게 뭐냐’ 같은 말이 오가면 좋자고 간 여행에서 기분만 상할 수 있다. 나이에 따른 각자의 체력과 취향을 고려해 움직이는 센스도 필요하다.
유교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있다. 명절이든 제사든, 조상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것은 ‘공경의 마음’과 ‘자손들의 화목’이라는 것이다. 안승준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서연구실장은 “조상들은 제사나 차례에서 ‘많이’ 준비하는 것보다 ‘마음과 정성’을 중요하게 여겼다”며 “우물물만 떠놔도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게 진짜다”고 말했다. 놀러가서 차례를 지내든, 해외에서 지내든 이번 추석엔 예의 본질을 잊지 말자. 유교에서 ‘숭조돈종(조상을 숭상하고 일가가 돈독하게 지내는 것)’은 떼어놓을 수 없는 ‘세트메뉴’다.
▼ 독자들의 가장 많은 호응 얻은 ‘신예기’ 시리즈는? ▼
동아일보가 창간 98주년을 맞아 연재한 ‘새로 쓰는 우리 예절 신예기(新禮記)’가 17일자로 마무리됐다. 총 30회 연재된 기사의 온라인 조회수를 합하면 3400만 건에 달했다. 댓글도 5만 개 가까이 달려 독자들의 높은 관심을 반영했다. 전통적인 관혼상제를 비롯해 직장과 공공장소 등 일상 전반에 걸친 불합리한 관습과 예법을 바꿔나가자는 신예기 시리즈는 변화한 시대에 적합한 예법을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줬다는 반응이 많았다.
가장 많은 호응을 얻은 △여름철 복장 예절(21회· 조회수 422만 회)을 비롯해 △휴가철 숙박업소 이용 예절 △교사와 학부모 간 카톡 예절 △차례상 등 제사 예법 △친·외가 간 차별적 상조제도 등이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직접적인 제도 개선도 이어졌다. 올 4월 신예기 4회에서 지적한 불평등한 친인척 호칭 문제는 여성가족부의 ‘3차 건강가정기본계획(2016~2020)’에 반영됐다. 정부는 양성 평등 관점에서 남편의 동생을 ‘도련님’이나 ‘아가씨’로 높여 부르는 반면 아내의 동생은 ‘처남’ ‘처제’로 낮춰 부르는 관행을 고쳐 나갈 방침이다.
또 친가와 외가를 차별하는 기업의 상조 복지 제도 문제를 지적한 신예기 2회 보도 이후 청와대 청원이 이어지면서 일부 기업은 기존의 차별적 상조복지 제도를 바꿨다. 친조부모 상에만 휴가와 조의금·장례용품을 지원하던 롯데제과는 올 4월 외조부모상도 친조부모상과 동일한 혜택을 주도록 제도를 고쳤다. 또 SK이노베이션과 현대중공업도 노사간 임단협에서 이 문제를 논의해 개선할 방침이다.
본보 독자위원회 위원인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거시적 담론, 속보 경쟁에 치우친 기존 보도와 달리 누구나 불편하게 생각하지만 쉽게 문제 제기하지 못하는 일상의 문제들을 감각적으로 끌어낸 새로운 방식의 기사였다”고 평가했다.
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위은지 기자 wizi@donga.com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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