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오전 6시 40분 제주시 충혼묘지 인근 도로. 여명이 밝아오나 싶더니 어느새 해가 떠올라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레이스를 시작하고 두 번째 맞이하는 해였다. 머리에 착용했던 랜턴을 껐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야간 레이스에서 벗어나니 졸음이 밀려들었다. 허벅지를 꼬집고 뺨을 때려도 잠시뿐이었다. 눈꺼풀이 자꾸만 내려앉았다. 바닥으로 고꾸라지면 끝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정신을 잡았다. 다리 근육 통증이 지속되면서 고통도 깊어졌다. 뛰기는커녕 걷기조차 버거웠다. 바닥난 체력을 뒤로하고 ‘완주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마지막 힘을 짜내 결승선을 겨우 통과했다.
○ 한계에 도전한 극한의 레이스
트랜스제주 조직위원회(위원장 현경욱)가 20일부터 21일까지 개최한 ‘2018 트랜스제주 울트라트레일러닝대회’ 111km에 직접 참가해 레이스를 경험했다. 기자 기록은 27시간20분9초로 제한시간인 30시간 이내 완주에 성공했다. 국내외 울트라트레일러닝대회를 여러 차례 경험했는데 이번 대회는 준비가 부족한 탓에 고통스러운 레이스였다.
20일 오전 6시 제주대 운동장. 56km, 111km 부문에 참가한 선수 900여 명이 카운트다운이 끝나자마자 함성을 지르며 한꺼번에 발을 내디뎠다. 제주지역 울트라 대회에 이처럼 많은 인원이 출발한 것은 드문 일이다. 더구나 홍콩, 일본 등 해외 24개국에서 350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올해 2번째 개최하는 대회인데도 불구하고 상당한 규모의 국제적인 대회로 급성장했다.
레이스 초반 제주대와 제주국제대 캠퍼스를 지나 오름(작은 화산체)인 삼의악을 오를 때는 멀리서 붉은 해가 떠올랐다. 한라산 관음사탐방로 입구에서 선수 기록을 재고 음료, 간식 등을 제공하는 첫 번째 체크포인트(CP)를 지나면서 본격적인 숲길, 산길 레이스를 시작했다. 한라산은 금방이라도 붉은 물이 떨어질 듯한 단풍의 서막이었다. 해무, 습기가 없는 덕분에 시가지와 오름 전경이 선명하게 잡혔다. 한라산 정상 백록담은 갈색 가을빛으로 물든 가운데 절반가량 찬 담수 경관 감상이 가능했다.
○고통 뒤 완주의 기쁨
한라산 탐방로 코스를 내려온 뒤 한라산 둘레길에 접어들었다. 56km 부문과 여기서 코스가 갈렸다. 111km 부문은 지금까지 개장한 둘레길 전역을 도는 코스로 짜였다. 한라산 탐방로에 이어 둘레길도 울퉁불퉁한 현무암 돌길이다. 꽃향유, 산박하, 털머위, 미역취 등 환하게 핀 야생화를 보는 눈 호강은 돌길의 고통이 엄습하면서 순간에 끝났다. 폭신한 흙길이 나오기도 했지만 이미 발바닥은 상당한 지압에 녹초가 됐다. 몸은 너덜너덜했지만 결승 라인을 넘은 완주의 기쁨은 레이스 동안 겪은 아픔을 보상받고도 남을 만큼 진했다.
111km 부문은 초청선수인 프랑스 출신 세바스티앵 셰뇨(46)가 11시간33분34초로 우승했다. 그는 “멋진 코스, 아름다운 섬, 좋은 사람들, 상당한 수준의 대회운영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가족들과 함께 다시 오겠다”고 우승 소감을 밝혔다. 111km 코스의 오르막을 모두 합친 누적 상승고도는 4200m에 이른다. 한라산 성판악탐방로로 정상을 4번 왕복하는 수준의 고난도다. 완주자에게는 울트라트레일몽블랑(UTMB) 등 유명 대회 참가에 필요한 포인트가 주어진다. 대회를 총괄한 안병식 씨는 “트레일러닝은 산, 들판, 오름 등 포장되지 않은 길을 달리거나 걷는 아웃도어 스포츠로 최근 아시아에서도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 이번 대회를 위해 제주도, 한국관광공사 등에서 후원을 했는데 제주가 트레일러닝 성지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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