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후 경기 성남시 분당구 이매동 A 아파트의 한 경비실. 안쪽 탁자 위에 피자 상자가 놓여 있었고, 피자 냄새가 물씬 풍겼다. 5분정도 지나자 한 초등학생이 와서 피자를 가져갔다. 경비원 B 씨(70)는 “예전 같으면 배달 음식까지 받아주지는 않았지만 이제 주민들에게 밉보이지 않아야 하니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이 아파트는 나흘 전인 19일 경비인력 감축에 대한 주민투표를 실시했다.
올해보다 10.9% 오른 최저임금(시급 8350원) 적용을 2개 월 가량 앞두고 경비인력 감축을 논의하는 아파트들이 늘고 있다. 9월 장하성 대통령정책실장이 거주하는 서울 송파구 아시아선수촌 아파트에서 경비원 52명을 감축하는 안을 두고 주민투표를 한데 이어 10월에는 A 아파트에서도 경비원 10여 명을 줄이는 것에 대해 주민투표가 진행됐다.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의 한 아파트는 11월 입주자대표회의에서 경비인력 감축을 논의할 예정이다.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경비원 인건비 증가에 대비하는 것이다.
본보 취재진은 지난해부터 경비인력 감축 논의가 있었거나 감축이 이뤄진 서울과 경기 아파트 10곳을 둘러봤다. 경비원들은 ‘언제든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필요 이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며 주민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 서글픈 서비스 경쟁
26일 오후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아파트에서 만난 경비원 C 씨(64)는 올해부터 비가 오는 날이면 동 입구에 우산을 갖다놓는다. 깜빡 잊고 우산을 안가지고 내려온 주민들에게 빌려주기 위한 것이다. 경비실에 맡긴 택배를 집까지 배달해주는 일도 잦아졌다. 지난해까지는 택배가 왔다는 알림스티커만 우편함에 붙였다. C 씨는 “이렇게라도 해서 주민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 아파트는 올해 1월 경비업체를 바꾸는 과정에서 경비원 20명을 줄였다.
주민들이 차를 타기 쉽도록 차를 대고 빼주는 발렛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비원도 있다. 주민들의 퇴근시간에 맞춰 엘리베이터를 1층에 대기시키기도 한다. 경비원 D 씨(57)는 주민의 자녀 이름까지 외워 “○○아 안녕”이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고 했다. 주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한 생존비법이다.
● 감축 위협은 진행형
인력 감축안이 부결된 아파트라고 해도 투표내용을 보면 경비원들은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아시아선수촌 아파트의 경우 인력 감축에 찬성한 가구(599가구)가 반대한 가구(451가구)보다 많았지만, 찬성 의견이 전체 1356가구의 과반(679가구)이 되지 않아 가까스로 감축이 무산됐다. 22일 투표 결과가 나온 A 아파트에선 1162가구 중 235가구가 감축에 찬성했다. 2019년 1월부터 인상된 최저임금이 적용돼 주민들이 인건비 증가를 체감하면 경비인력을 줄이자는 논의가 언제든 재개될 수 있다. 경비원들로서는 살얼음판 같은 상황이 이어지는 것이다.
지난해 최저임금이 16.4% 급증하자 근무시간을 줄여 경비원 인건비를 동결시킨 아파트도 있다. 점심, 저녁에 1시간씩 쉬던 것을 각각 2시간으로 늘리고, 자정부터 시작하던 야간 휴무시간을 오후 11시로 앞당기는 식이다. 그렇다고 실제로 쉬는 시간이 늘어나지도 않는다. 휴무시간이라고 자리를 비웠다가는 ‘일을 안 한다’는 민원이 제기될 수 있는 만큼 그냥 계속 일을 하는 게 낫다는 경비원이 많다. 경비원 D 씨는 “임금 더 달라고 안 할 테니 자른다고 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