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일제강점기 시절 강제징용에 대한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일본 전범기업의 법적 동일성을 인정해 주목된다.
이번 선고 결과로 신일철주금(신 일본제철)을 비롯해 일본 패전 후 특별법에 따라 해산·청산 절차를 겪은 미쓰비시중공업 등 다른 전범기업들에게도 같은 결론이 내려질 것으로 보인다.
31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전날 이춘식씨 등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재상고심에서 “각 1억원씩 위자료를 지급하라”며 원고 승소 판결을 확정하면서 신일철주금이 구 일본제철을 승계한 것이 맞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동안 신일철주금은 일제강점기 시절 강제노역을 시킨 일본제철과 다른 회사라는 주장을 펴왔다. 두 회사는 법인격이 다르고 일본제철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지는 손해배상 채무를 승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제철은 1934년 1월 설립돼 일본 가마이시·야하타·오사카 등에서 제철소를 운영했다. 일본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하면서 군수물자 생산을 위해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공포했고 1942년 ‘관 알선’을 통해 한반도에서 인력을 모집하다가 1944년 국민징용령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제철은 동원된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전혀 주지 않고 감시와 구타 등 강압에 의한 노역을 시켰다.
그 뒤 일본이 패전하면서 전범기업들은 연합군사령부에 의해 전쟁에 적극 협력한 책임 등에 따라 해산 및 청산절차를 밟았다. 일본제철은 1946년 일본 정부가 회사경리응급조치법과 기업재건정비법을 제정·시행함에 따라 특별경리회사로 지정돼 1950년 4월1일 해산했다.
이어 일본제철의 자산 출자로 제2회사인 야하타제철·후지제철·일철기선·하리마내화연와 4개 회사가 설립됐다. 당시 일본제철이 보유하던 야하타제철소의 자산과 영업, 이사 및 종업원은 야하타제철 주식회사가, 와니시·가마이시·후지·히로하타 제철소의 자산과 종업원 등은 후지제철 주식회사가 각각 승계했다.
야하타제철 주식회사는 1970년 3월 일본제철로 이름을 바꿨고 그해 5월 후지제철을 합병해 신일본제철이 됐다. 지난 2012년 8월에는 스미토모 금속공업을 합병한 후 그해 10월1일 신일철주금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일본 법원과 국내 법원의 1·2심은 신일철주금이 일본제철을 승계하지 않았다며 일본 기업 손을 들어줬다. 일본제철과 별개의 법인격을 갖고 있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채무가 승계되지 않는다는 신일철주금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반면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지난 2012년 5월24일과 그로부터 6년5개월이 지난 2018년 10월30일의 대법원은 모두 신일철주금과 일본제철이 실질적으로 동일하다고 결론 지었다. 패전 후 제정된 일본법에 따라 해산을 거쳐 현 회사로 변경됐지만 국내법상 동일한 회사로 충분히 인정된다는 취지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일본제철이 일본국 법률에 따라 해산되고 ‘제2회사’가 설립된 뒤 흡수합병 과정을 거쳐 신일철주금으로 변경되는 등의 절차를 거쳤다고 해도 일본제철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권을 신일철주금에 행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는 2012년 대법원 판결에 위법이 없다고 인정한 것이다. 당시 대법원은 일본제철이 현 회사로 변경되는 과정에서 일본제철의 영업재산, 임원, 종업원을 실질적으로 승계해 회사의 인적·물적 구성에는 기본적인 변화가 없다고 봤다.
또 패전이라는 비상상황에서 전후처리 및 배상채무 해결을 위한 일본의 특별한 목적 아래 제정된 기술적 입법에 불과한 일본 국내법을 이유로 일본제철의 대한민국 국민에 대한 손해배상 채무가 면탈되는 결과를 용인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대한민국의 준거법으로 지정된 일본법을 적용한 결과가 대한민국의 공서양속에 위반되면 일본법의 적용을 배제하고 국내 법률을 적용해야 한다는 근거에 따른 것이다.
대법원은 “일본제철의 책임재산이 되는 자산과 영업, 인력을 제2회사에 이전해 동일한 사업을 계속한 점 등에 비춰 일본제철과 신일철주금은 그 실질에 있어 동일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봄이 상당하다”며 “법적으로 동일한 회사로 평가하기에 충분하다”고 밝혔다.
파기환송 후 항소심도 강제징용 및 인권침해를 저지른 군수업체의 손해배상 책임을 면하게 하는 것은 과거 일본이 일으켰던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 등을 가치로 내세운 일본 헌법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당시 일본제철 등의 채무 정리는 문명국가에서 용인될 수 있는 갱생절차로 볼 수 없다고도 했다.
이와 함께 패전 후 독일의 사례도 제시했다. 독일은 전범 기업 관련 기한 내 채권자들이 등록하지 않은 청구권을 소멸하는 것으로 정하면서도 회사가 알고 있는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법을 제정한 바 있다. 또 독일 법원 등이 손해배상 청구를 불허한 경우도 있으나 자발적 보상을 하고 장기간 논의 끝에 재단을 설립해 보상금을 지급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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