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신상옥 감독은 탄탄한 근육질 몸매에 조각 같은 얼굴을 지닌 강인하고 반항아적 이미지의 신인 배우를 캐스팅합니다. 대구에서 갓 올라온 새파란 신인에게 최고의 별이 되라는 의미로 신 감독이 붙여준 예명이 ‘신성일(사진)’입니다. 그해 ‘로맨스 빠빠’(1960년)라는 작품을 통해 신성일은 강신성이라는 본명을 버리고 배우 신성일로 재탄생합니다.
그 후 신성일은 ‘아낌없이 주련다’ ‘가정교사’ ‘동백 아가씨’ ‘5인의 건달’ ‘춘향’ ‘청춘교실’ ‘맨발의 청춘’ ‘별들의 고향’ 등 무려 506편의 영화에서 주연으로 활약하며 로맨스 영화의 아이콘으로 등극합니다. 1년에 10편씩 꼬박 50년을 해야 이룰 수 있는 엄청난 업적입니다.
신성일(1937∼2018)은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발자취를 남기고 4일 향년 81세로 타계했습니다. 폐암 3기로 오랜 투병 생활을 해왔으나 더 이상 이승에 머물지 못할 정도로 견디기 힘들었나 봅니다. 암과 싸우면서도 다음 작품 준비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영화가 삶이고, 삶이 곧 영화인 한 세대의 풍운아가 곱게 물든 낙엽 사이로 사라지고 나니 그가 젊음을 불살랐던 1960년대로 시곗바늘을 되돌려보고 싶습니다.
1960년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태어난 전후 세대가 대중문화의 주역으로 등장하던 시기였습니다. 새로운 희망을 찾던 젊은이들에게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암살(1963년 11월)은 충격이었습니다. 베트남전쟁(1960∼1975년)에 참전해야 하는 상황에 또다시 좌절하고 방황합니다. 이성과 합리성으로 상징되는 근대성에 염증을 느낀 젊은이들이 욕망의 분출구를 찾아 나섭니다. 미국에서는 히피 문화가 유행했고 프랑스에서는 68세대로 상징되는 저항 문화가 확산됐으며 영국 4인조 그룹 비틀스의 로큰롤에 세계의 젊은이들은 열광합니다. 당시 이런 시대적 상황과 신성일의 반항아적 이미지는 아주 잘 어울렸습니다. 당대를 대표하는 꽃미남이면서 반항아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신성일은 미국 배우 제임스 딘(1931∼1955), 프랑스 배우 알랭 들롱(1935∼)과 비교됩니다. 비주류 청년들의 사랑과 방황을 그린 제임스 딘의 ‘이유 없는 반항’(1958년), 알랭 들롱의 ‘태양은 가득히’(1960년), 신성일의 ‘맨발의 청춘’(1964년)은 절묘하게 중첩됩니다.
‘맨발의 청춘’에서 서두수(신성일)와 요안나(엄앵란)는 계층적 장벽을 뛰어넘는 사랑을 나눕니다. 요안나는 서두수에게로 와서 레슬링을 보며 종이에 싼 만두와 통조림을 먹습니다. 서두수는 요한나에게로 와서 스테이크를 손으로 들고 뜯어먹고 수프를 그릇째 마셔버립니다. 둘 사이의 사랑은 문화적 충격을 흡수하고 단절을 뛰어넘습니다. 계층과 문화의 장벽을 넘는 남녀의 러브스토리는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영화 ‘타이타닉’(1997년)에서 그대로 재현됩니다. 서두수는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로, 요안나는 케이트 윈즐릿으로 되살아납니다. 3등 칸에서 윈즐릿은 디캐프리오의 하류층 문화를 경험하고, 디캐프리오는 1등 칸에서 포크와 나이프 쓰는 법을 서투르게 익히며 상류층 문화를 경험합니다.
1960년대의 반항 문화는 19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을 통해서, 최근에는 방탄소년단을 통해서 재현됩니다. 그리고 ‘맨발의 청춘’ 신성일은 고뇌하고 방황하는 청년들에게 아름다운 열정과 패기를 남기고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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