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법관대표들이 사상 초유의 ‘판사 탄핵’ 결의를 하면서 관련 논의에 불이 붙은 가운데 과거 이뤄진 법관 관련 탄핵 논의 또한 주목받고 있다.
앞서 법관 관련 탄핵소추 논의는 지난 1985년과 2009년 크게 두 차례 이뤄졌던 바 있다. 하지만 모두 국회에서 불발되면서 탄핵안이 헌법재판소의 심판대에 오르지 못했다.
20일 법조계에 따르면 전국 법관대표들이 전날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농단 의혹에 관여한 법관들 탄핵을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을 낸 이후 정치권과 시민사회 등에서 관련 논의가 확산하고 있다.
법관 탄핵 찬성 측에서는 헌법적 장치를 통해 사법부 쇄신 의지를 적극적으로 보조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반면 국회를 통한 법관 탄핵소추는 사법부 독립을 훼손할 수 있다는 등의 반대론도 만만찮은 실정이다.
그간 국내에서 탄핵을 통해 법관이 파면된 사례는 없다. 앞서 대법원장이나 대법관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2차례 발의된 적이 있기는 하지만, 모두 부결되거나 폐기 수순을 밟았다.
첫 법관 탄핵 발의는 지난 1985년 10월 고 유태흥 전 대법원장에 대해 이뤄졌다. 당시 야당이던 신한민주당(신민당) 의원 102명 전원의 이름으로 유 전 원장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발의, 본회의 논의까지 거쳤으나 재석 247명 중 ▲찬성 95명 ▲반대 146명 ▲기권 5명 ▲무효 1명으로 부결됐다.
이 탄핵안 발의 배경에는 ‘특정 법관에 대한 인사 불이익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앞서 박시환(65·사법연수원 12기) 전 대법관은 신군부 집권 시절이던 1985년 6월 가두시위 및 유인물 배포 혐의로 즉결심판에 넘겨진 대학생 11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가 같은 해 9월 춘천지법 영월지원으로 발령받았다.
또 서태영(67·6기) 전 판사 박 전 대법관에 대한 보복성 인사를 비판하는 내용의 기고를 하자 서울민사지법 발령 하루 만에 부산지법 울산지원으로 좌천됐다. 이후 부당 인사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었는데, 이는 이른바 ‘2차 사법파동’이 벌어지게 되는 불씨 가운데 하나가 됐다.
당시 벌어진 탄핵 관련 논의에서 찬성 측은 “위헌 행위를 한 공직자에 대한 탄핵 여부를 확인하는 것은 당연한 순리”, “정의와 형평에 어긋난 인사권 행사는 재량의 정도를 넘어 사법권 독립을 하지 못하게 하는 구조적 폐단을 만든다” 등의 주장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반대 측은 “중립지대에 있는 사법부 내부 문제를 정치공세의 제물로 삼는 것 자체가 사법권 침해”, “사법부의 내부 규율인 인사고유권과 재량 향위를 갖고 위법행위로 오해해선 안 된다” 등의 반박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두번째 법관 탄핵 발의는 2009년 11월 신영철(64·8기) 전 대법관에 대해 이뤄졌다. 이는 당시 민주당·민주노동당·진보신당·창조한국당·친박연대 등 5개 야당과 무소속 의원 105명의 발의로 이뤄졌다.
해당 탄핵안은 이른바 ‘재판개입’ 문제를 기화로 발의됐다.
신 전 대법관이 지난 2008년 서울중앙지법 원장으로 재직하면서 ‘광우병 촛불집회’ 관련 사건을 특정 재판부에 몰아주기 식으로 배당하고 담당 판사들에게 이메일 등을 보내는 등 재판업무에 개입했다는 것이 당시 탄핵안 발의 사유였다.
하지만 신 전 대법관에 대한 탄핵안은 국회의 표결조차 거치지 못하고 폐기됐다. 국회법 130조에 따라 탄핵소추안은 국회 본회의에 보고된 뒤 24~72시간 이내에 처리되지 않으면 폐기된 것으로 보는데, 여야 간 이견차를 좁히지 못해 기한을 넘겼던 까닭이다.
당시 신 전 대법관에 대한 탄핵 여부를 두고서도 찬반 공방이 상당했다. 찬성 측은 “대법원 진상조사 결과를 통해 재판개입이 드러났다”는 취지로, 반대 측은 “사법부 권위를 훼손하려는 계획적 음모”라는 등으로 맞섰던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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