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국어 31번’ 불수능… 수능 난도조절은 신의 영역?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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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 리포트]수능 전체는 쉬워졌지만… ‘킬러문항’은 더 어려워져
일선학교, 불수능-물수능 지도 고민
‘사교육 타파’ 강조된 2015년 이후 변별력 좌우 킬러문항, 공포대상화
수시확대속 학생 실력편차 커지며 일각선 “난도조절 실패는 숙명”

16일 서울 진선여고에서 열린 한 입시업체의 ‘2019년 수능 가채점 분석 설명회’에 많은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참가해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 있다(왼쪽). 올해 수능 ‘국어31번’은 참고도까지 곁들인 만유인력 법칙에 관한 내용
이어서 물리 수학 문제라는 지적도 나왔다. 뉴시스
16일 서울 진선여고에서 열린 한 입시업체의 ‘2019년 수능 가채점 분석 설명회’에 많은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참가해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 있다(왼쪽). 올해 수능 ‘국어31번’은 참고도까지 곁들인 만유인력 법칙에 관한 내용 이어서 물리 수학 문제라는 지적도 나왔다. 뉴시스
‘같은 밀도의 부피 요소들이 하나의 구 껍질을 구성하면, 이 부피 요소들이 구 외부의 질점 P를 당기는 만유인력들의 총합은, 그 구 껍질과 동일한 질량을 갖는 질점이 그 구 껍질의 중심 O에서 P를 당기는 만유인력과 같다.’(올해 대학수학능력시험 ‘국어 31번’ 문제 지문 중 일부)

“3수생인데 1교시 국어 시간에 심리적으로 무너져버렸어요. ‘31번’이 ‘넌 4수야’라고 놀리는 것 같았죠.”

올해 수학능력시험(수능) 화제 문항은 단연 ‘국어 31번’이었다. 과학 지식을 다룬 난해한 지문으로 국어 문제가 아닌 물리나 수학문제란 질타가 쏟아졌다. 수험생들은 올해도 불수능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 적절한 수능 난도 조절은 신의 영역?

수능에서 변별력은 필수다. 이 가운데 최상위권 학생의 실력을 판별하는 게 ‘킬러 문항’의 역할이다. 그럼에도 최근 수년간 킬러 문항은 도가 지나치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나치게 어렵거나 괴상해 시험이 아니라 ‘찍기’의 영역으로 변질됐다는 것이다. 킬러문항이 공포의 대상이 된 건 대략 2015년 이후부터다. 입시전문가들은 이를 사회 분위기와 연결지어 설명한다. ‘교과서 중심’ ‘평이한 수준’ ’사교육 타파’ 등이 강조되면서 수능 전체 수준은 평이해졌지만 킬러문항은 더 어려워졌다는 얘기다.

이재진 대학미래연구소 소장은 “수능이 곧 사교육과 연결된다는 인식 때문에 출제자들은 난도 조절에 민감하다. 킬러 문항으로 상위권 학생들의 에너지 소모가 크지만, 전체가 사교육에 휘둘리는 것보다는 낫다는 인식이 은연중 퍼져 있다”고 했다.

학생들의 실력 편차가 커지면서 수능 난도 조절이 어려워진 측면도 있다. 2009년 학생부종합전형 전신인 입학사정관제가 도입된 뒤 지난 10년간 수시 비중은 점차 확대됐다. 현재 주요 15개 대학에서 수시로 신입생을 뽑는 비율은 44.7%다. 자연히 수험생들은 문이 넓은 수시로 눈을 돌린다. 지난 3년간 수능 최저등급이 있는 전형은 6.9%, 지원자는 17.7% 줄었다. 수능을 보지 않아도 수시로 입학할 수 있다. 수능에 주력하는 수험생이 줄다보니 문제가 조금만 어려워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반면 사교육 세례를 받은 일부 상위권 학생들은 킬러 문항에 대한 내성을 키웠다. 한 입시전문가는 “대다수 학생은 수능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아 조금만 어려워도 불수능으로 느끼는 반면 상위권 학생들은 킬러 문항도 척척 풀어낸다. 이 괴리 사이에서 난도를 맞추기란 ‘신의 영역’에 가까운 일”이라고 했다. 상대평가 체제에서 난도 조절 실패는 숙명이란 의견도 있다. 권대봉 고려대 교육학과 명예교수는 “서열화된 대학 구조에 수능 등급을 맞추려다보니 초고난도 문제를 배치할 수밖에 없다. 대학서열에 수능 난도를 맞추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 비대해진 수시, 취지 잃은 수능

수능을 치른 지 열흘째. 불수능으로 낭패를 본 수험생들은 정시를 준비하며 분투하고 있다. 서울 마포구의 일반고에 다니는 신모 양은 평소 모의고사 성적이 좋아 정시를 노렸으나 수능을 망쳐서 재수를 고려 중이다. 강남 대치동의 입시학원에서 공부하던 재수생 이모 군도 “국어 영어 수학 모두 모의고사 1, 2등급을 유지했는데 수능 국어는 3등급을 받았다”며 “이 성적에 맞춰 대학에 가자니 억울하고 울분이 터져 3수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교과과정 수준을 벗어난 불수능에 예비 고3들은 일찌감치 사교육에 눈을 돌리고 있다. 고2학생을 둔 학부모 김서윤 씨는 “내년에도 불수능일 가능성이 높아 보여 겨울방학 수능 패키지에 등록했다”고 했다. 이영덕 대성학력개발연구소장은 “불수능 이후엔 예비수험생들이 겨울방학에 대비를 더 철저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보습학원 등록률이 예년에 비해 껑충 뛰었다고 한다”고 했다. 컨설팅업체에도 문의가 크게 늘었다.

학교 현장도 입시전략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내년 수능이 불수능을 유지할지, 반대로 물수능이 될지 알 수 없어 학생지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다.

학부모들은 수시와 정시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현실에 불만을 토로했다. 한 학부모는 “수시와 정시가 혼재돼 대입 전형 방식만 수천 개에 달한다. 고교 1학년부터 수시와 정시 중 하나를 선택해 사교육 등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하는 구조가 낭비로 느껴진다”고 했다.

숙명여고 쌍둥이 사태 등으로 올해엔 특히 수시에 대한 불신이 강하다. 성적 이외 활동으로 평가한다지만 기준이 애매모호하다는 이유가 많다. 교육 관련 온라인커뮤니티에는 수시로 상위권 대학에는 붙고 하위권 대학에는 불합격하거나, 내신 하위권인 학생이 상위권 학생이 떨어진 대학에 합격하는 사례를 제시하며 불만을 쏟아낸다.

반면 수시를 통한 입학생 선발을 찬성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 고2 자녀를 둔 손자영 씨는 “시험 점수만으로 대학에 들어가던 세대인 학부모는 ‘점수로 줄 세우기’ 방식이 가장 공정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양성을 강조하는 입시 방향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수능 제도를 설계한 박도순 고려대 교육학과 명예교수는 “비대해진 수시와 역할을 잃은 수능 사이에서 현 교육제도가 갈팡거리고 있다”며 “수시가 공정성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 대학의 선발권을 확대하는 방향도 고려할 만하다”고 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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