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 내란죄가 맞느냐”…70년 만에 4·3 수형인에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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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년 11월 26일 15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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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법회의 재심 첫 피고인 심문…‘공소사실’ 입증 쟁점
진술 신빙성 더할 당시 ‘미군 사진’ 참고자료로 제출

26일 오후 제주시 이도2동 제주지방법원 앞에서 4·3 생존 수형인 18명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제기한 내란실행·국방경비법 위반 등에 대한 재심 청구사건 공판에 앞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18.11.26/뉴스1© News1
26일 오후 제주시 이도2동 제주지방법원 앞에서 4·3 생존 수형인 18명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제기한 내란실행·국방경비법 위반 등에 대한 재심 청구사건 공판에 앞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18.11.26/뉴스1© News1


“국가가 다시 물어본다, 당신들 내란죄가 맞느냐.”

제주4·3사건이 발발한 지 70년 만에 수형인들에 대한 군법회의 재심 재판이 열리면서 법정에서 처음으로 4·3의 역사가 다뤄지게 됐다.

특히 당시 수형인들의 행적을 증명해줄 미군의 사진이 증거자료로 제출될 예정이어서 진술의 신빙성에 무게가 실릴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 판결문 없는 재심 재판…‘공소사실 입증’ 쟁점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재판장 제갈창 부장판사)는 26일 오후 2시부터 4·3 생존 수형인 18명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제기한 내란실행·국방경비법 위반 등에 대한 재심 청구사건 두 번째 공판을 진행했다.

지난 10월 29일 피고인들과 검찰을 불러 재판 절차를 정한데 이어 공소사실 입증을 위한 본격적인 재판에 돌입한 것이다.

이날 공판에는 군사재판 재심청구를 했던 수형인 18명 중 1948년 내란실행 혐의로 구금됐던 10명이 출석해 검사의 심문을 받는다.

이튿날인 27일에는 1949년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구금된 8명에 대한 심문이 이뤄지는데, 이 중 정기성 할아버지(96)는 병환으로 참석이 불가해 재판부에 진단서를 제출했다.

피고인 18명은 1948~1949년 이유도 모른 채 군·경에 체포돼 최소 1년에서 최대 20년간 다른 지역 교도소에서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며 불법 군사재판에 의한 형을 무죄로 해달라고 주장하고 있다.

26일 오후 제주시 이도2동 제주지방법원 앞에서 4·3 생존 수형인 18명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제기한 내란실행·국방경비법 위반 등에 대한 재심 청구사건 공판에 앞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18.11.26/뉴스1 © News1
26일 오후 제주시 이도2동 제주지방법원 앞에서 4·3 생존 수형인 18명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제기한 내란실행·국방경비법 위반 등에 대한 재심 청구사건 공판에 앞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18.11.26/뉴스1 © News1


피고인들에 따르면 국가기록원에는 제주4·3 당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군법회의가 1948년 12월과 1949년 7월 두 차례 실시됐음을 보여주는 ‘수형인명부’가 남아 있다.

여기에는 군법회의에 회부된 2530명(1948년 871명, 1949년 1659명)의 피고인 명부와 함께 설치명령과 공판장소, 죄목, 심사장관의 조치 등이 담긴 명령서가 담겨 있다.

문제는 4·3 수형인에 대한 공소장이나 공판기록, 판결문 등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군당국이 1948년 군법회의와 1949년 군법회의에서 헌법 및 법률이 정한 재판절차도 없이 ‘판결’ 형식으로 피고인들을 수감하는 등의 국가폭력을 자행했다는 피고인들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대목이다.

재판부는 재심의 근거가 되는 확정 판결의 직접 자료는 없지만 이들이 교도소에 구금됐다는 정황이 확인됨에 따라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사상 최초로 판결문 없이 이뤄지는 재심 재판에서 검찰 측은 이례적으로 피고인들의 심문을 통해 공소사실을 특정하기로 했다.

검찰 측은 “유무죄를 떠나 질문하고 공소사실 특정을 위한 노력을 해보고 싶다. 심문 절차를 통해 법원의 판단을 받으면 피고인들도 정당한 재판을 받았다는 만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며 “향후 재심 청구가 더 있을 수 있는데 진술을 끌어내야 진실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50년 7월 1일 미군 사진부대 사진병이 수원역에서 촬영한 소년수들의 사진. (임재성 법무법인 해마루 변호사 제공) © News1
1950년 7월 1일 미군 사진부대 사진병이 수원역에서 촬영한 소년수들의 사진. (임재성 법무법인 해마루 변호사 제공) © News1

◇ 재심 재판이 갖는 의미…진술 신빙성 더할 ‘증거’ 등장

26일 공판을 앞두고 양동윤 제주4·3도민연대 대표는 이번 재판이 4·3의 ‘진실’을 공식적으로 꺼내 얘기하는 자리라는데 의미를 뒀다.

양 대표는 “1948년 마을이 불타서 산으로 도망친 사람에게 내란죄를 적용했는데 제대로 바로 잡지도 못한 채 70년을 살았다”며 “개인의 누명을 벗는 자리에서 나아가 왜곡된 4·3의 역사를 법정에서 처음으로 다루는 자리”라고 강조했다.

이어 “70년간 왜곡된 역사 속에서 많은 도민들이 희생되고 유가족들이 고통 받았는데 정면으로 이 역사가 다뤄진다는데 있어서 매우 뜻깊다”며 “산에 숨어 산 게 왜 폭동이고 반란인지 법정에서 명명백백하게 다뤄지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임재성 법무법인 해마루 변호사 역시 “4·3 70년 역사에 있어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재판의 의미를 짚었다.

임 변호사는 “2017년 대한민국 정부가 70년 전 내란죄 유죄를 선고받은 이들에게 다시 한 번 당신들 내린죄가 많느냐고 질문을 할 것”이라며 “피고인들은 불법구금도 고문도 없는 자유로운 법정에서 그렇지 않다고 답변을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피고인들은 당시에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고 억울한 옥살이를 했는지 진술을 할 예정”이라면서 진술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공신력 있는 참고자료를 제시했다.

바로 1950년 7월1일 미군 사진부대 사진병이 수원역에서 촬영한 소년수들의 사진으로,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팀이 내셔널 아카이브에서 발견한 것이다.

임 변호사는 “인천형무소에 수감됐던 수형인들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6월30일 형무소로 빠져 나와 수원으로 걸어갔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군인을 만나 체포돼 고개를 숙인 채 수원역에 있었다고 일관되게 진술했다”며 “이 진술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이같은 진술을 한 양일화 할아버지(89)는 “수원역에 꿇어앉아 있었던 걸 정확히 기억한다”며 당시의 기억을 꺼내놓기도 했다.

재판부는 26일과 27일 이틀간 심문을 진행한 뒤 12월 17일 결심 공판을 가질 예정이다. 이어 피고인들이 고령인 점을 고려해 이르면 올해 말쯤 선고를 내리기로 했다.

(제주=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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