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죄인이 아닙니다”…70년 한(限) 토해낸 4·3수형인들

  • 뉴스1
  • 입력 2018년 11월 26일 17시 29분


군법회의 재심 첫 피고인 심문서 한서린 울분 토해
공소사실 입증 쟁점…신빙성 더할 ‘사진’ 제출하기도

26일 오후 제주시 이도2동 제주지방법원 앞에서 4·3 생존 수형인들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제기한 내란실행·국방경비법 위반 등에 대한 재심 청구사건 공판에 앞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2018.11.26/뉴스1 © News1
26일 오후 제주시 이도2동 제주지방법원 앞에서 4·3 생존 수형인들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제기한 내란실행·국방경비법 위반 등에 대한 재심 청구사건 공판에 앞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2018.11.26/뉴스1 © News1
“피고인 현창용은 고문을 받아 조서에 지장을 찍은 게 맞습니까?”

1948년 경찰에 끌려가 내란죄로 20년간 옥살이를 했다는 현창용 할아버지(86)는 70년 만에 법정에서 발언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더듬더듬 의사소통이 가능했지만 건강 악화로 인해 말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26일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재판장 제갈창 부장판사)는 4·3 생존 수형인 18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내란실행·국방경비법 위반 등에 대한 재심 청구사건 두 번째 공판을 진행했다.

지난 10월 29일 피고인들과 검찰을 불러 재판 절차를 정한데 이어 본격적인 심문에 돌입한 것이다.

이날 공판에는 군사재판 재심청구를 했던 수형인 18명 중 1948년 내란실행 혐의로 구금됐던 10명이 출석해 검사의 심문을 받았다.

오는 27일에는 1949년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구금된 8명에 대한 심문이 이뤄질 예정이지만, 이 중 정기성 할아버지(96)는 병환으로 인해 참석이 불가해 재판부에 진단서를 제출했다.

재판의 쟁점은 ‘공소사실 입증’이었다.

사상 최초로 판결문 없이 열린 재심 재판이다보니 검찰 측이 이례적으로 피고인들의 진술을 토대로 공소사실을 구체화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검찰 측은 앞서 법원이 재심청구인들에 대한 심문을 진행하긴 했지만 본안이 아니라 재심 개시 결정을 위한 절차였기 때문에 정당한 재판을 위해 다시 한 번 심문을 진행했다.

1950년 7월 1일 미군 사진부대 사진병이 수원역에서 촬영한 소년수들의 사진. (임재성 법무법인 해마루 변호사 제공) © News1
1950년 7월 1일 미군 사진부대 사진병이 수원역에서 촬영한 소년수들의 사진. (임재성 법무법인 해마루 변호사 제공) © News1


대부분 80~90대로 이뤄진 피고인들은 휠체어를 타거나 가족의 부축을 받으며 지팡이를 짚은 채로 법정에 들어섰다.

검사는 구금 증거 자료인 ‘수형인명부’와 재심청구 심문 내용 등을 토대로 사실 여부를 확인하며 각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사실을 특정짓기 위한 심문을 이어갔다.

검사는 피고인들이 잘 들리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 바로 앞에 의자를 갖다놓고 눈을 마주치며 큰소리로 질문을 했다. 곁에는 제주 사투리에 능숙한 통역인도 함께 했다.

변호를 맡은 법무법인 해마루 변호사들 역시 시선을 맞추며 당시 어떤 고문을 당했고 어떤 상황에 처해있었는지 기억을 끄집어 내기 위해 애썼다.

1948년 집이 불타 산으로 피신했다가 이유도 모른 채 경찰에 끌려가 전주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다는 박내은 할머니(87)는 “매를 죽도록 맞았다. 손을 묶은 채 천장에 매달아 놓고 때렸다”면서 “아무 죄도 없다고 해도 계속 죄인이라고 하니 억울하고 또 억울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변호인 측은 피고인들의 진술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참고자료를 제출하기도 했다.

1950년 7월1일 미군 사진부대 사진병이 수원역에서 촬영한 소년수들의 사진으로,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팀이 내셔널 아카이브에서 발견한 것이다.

변호인 측은 “인천형무소에 수감됐던 수형인들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6월30일 형무소로 빠져 나와 수원으로 걸어갔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군인을 만나 체포돼 고개를 숙인 채 수원역에 있었다고 일관되게 진술했다”며 “이 진술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이같은 진술을 한 양일화 할아버지(89)는 “수원역에 꿇어 앉아있었던 걸 정확히 기억한다”며 당시의 기억을 꺼내놓았다.

한 명당 20~30분 가량 질문과 답변이 오갔고, 오래 앉아있기 힘든 피고인들은 자신의 차례가 끝나면 비틀비틀 느린 걸음으로 법정을 빠져나갔다.

18세에 끌려가 전주형무소에서 징역 1년을 살았다는 김평국 할머니(88)는 “그때 하도 매를 많이 맞았다. 고문으로 몸은 엉망이 됐다”며 “1년 넘게 힘겹게 재판을 이어가고 있는데 이제라도 한을 풀고 갈 수 있게 해주길 바란다”고 기대했다.

수형인들이 4?3의 족쇄를 풀어줄 것을 요구하며 재심 청구소송을 제기한 건 지난해 4월 19일이다.

재판부는 26일과 27일 이틀간 심문을 진행한 뒤 12월 17일 결심 공판을 가질 예정이다. 이어 피고인들이 고령인 점을 고려해 이르면 올해 말쯤 선고를 내리기로 했다.

(제주=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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