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 알림음’ 환청까지…휴대전화·신용카드 없이 살아보니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27일 17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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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오전 9시 서울 관악구 2호선 서울대입구역 인근. 기자는 하루 동안 휴대전화와 신용카드를 쓰지 않고 회사 업무와 일상생활을 하기로 했다. 해방감을 느낀 지 잠시, 시작부터 장벽에 부딪혔다. 회사에 업무 보고를 해야 했지만 공중전화가 보이지 않았다. 골목을 30여분 헤맨 끝에 공중전화를 찾았다. 동전을 넣고 메모장에 적어둔 선배 기자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지만 선배 기자는 받지 않았다. 취재원과 다른 동료 기자들도 모르는 번호라 그런지 받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업무 시간이 평소의 세배 이상 걸렸다.

24일 발생한 ‘KT아현지사 화재’는 네트워크로 모든 사물이 연결되는 ‘초(超)연결 사회’의 민낯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기자는 일일 체험에서 휴대폰과 신용카드를 두고 왔을 뿐인데 모든 일상생활과 업무가 한순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함’이 단절되자 초조함과 무력감에 빠진 기분이 들었다.


● ‘현금 없는 카페’ 발길 돌려

점심시간이 되자 배가 고파왔다. 신용카드가 없어 현금을 찾아야 했다. 집에서 챙겨 온 통장을 들고 은행에 갔다. 대기 인원이 40명을 넘었다. 현금 인출 신청서를 작성하고 신분증을 제출하고 5만 원을 찾았다. 돈을 찾기까지 약 1시간이 걸렸다. 평소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서 현금을 찾을 때 느끼지 못한 지루한 시간이었다.

식당을 찾는 데도 애를 먹었다. 한 달 전 방문한 서울 강남역 인근의 식당이었지만 길찾기 애플리케이션(앱)이 없어 찾는데 애를 먹었다. 방문하려던 식당을 포기하고 근처의 다른 식당에서 먹었다. 오후 2시 반 강남역 11번 출구에서 만나기로 한 취재원이 보이지 않았다. 취재원은 차가 막혀 15분가량 늦는다는 말을 전하지 못했다고 한다. 기자가 지하에서 기다리는 동안 취재원은 지하철역 밖에서 기다려 동선이 엇갈려 버렸다.

기사 작성을 위해 자주 이용하는 스타벅스 카페를 찾았다. 계산대 앞에 ‘우리 매장은 현금을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보였다. 아뿔사, ‘캐시리스(현금 없는) 카페’였다. 스타벅스코리아는 올 10월 말 기준으로 전체 매장 1230개 가운데 403개를 현금 없는 매장으로 운영한다. 아쉽지만 발걸음을 돌려 다른 카페를 찾아 나섰다.

편의점에서 생수 하나 사 마시기도 쉽지 않았다. 생수 한 병을 들고 1만 원권 지폐를 꺼냈다. 직원이 금고를 열어 보더니 동전이 부족하다며 손사래를 쳤다. 오후 5시경 현금이 떨어져 다시 은행을 찾았지만 이미 창구 문이 닫혔다. 기자의 1년 카드 결제 횟수는 약 2000건. 휴대전화와 교통카드가 사라지자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것만 같았다.

휴대전화와 신용카드가 손에서 떨어지자 불안하고 초조한 금단현상이 생겼다. 카카오톡 대화방에서 ‘나만 모르는 중요한 이야기’가 오갔을 것 같은 걱정이 들었다. 빈 호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지는 이른바 ‘유령 진동 증후군’을 경험했다. 카카오톡 알림음이 귀에서 들리는 것 같은 환청과, 자리에서 일어날 때 휴대전화를 찾는 증상도 생겼다. 오후 9시경 집으로 귀가해 카카오톡을 확인하자 약 12시간 만에 1000통이 넘는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 불안·초조함…‘카톡 알림음’ 환청 들려

올 7월 ‘2018년 디지털 라이프 스타일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소비자의 51.5%는 하루 이상 휴대전화 사용을 중단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전문가들은 KT아현지사 화재는 초연결사회에서 모든 생활이 끊기고 멈춰버렸을 때 ‘위험 사회’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분석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초연결사회에서 단절을 경험한 사람들은 ‘트라우마’를 겪은 것이다. 트라우마는 유사한 사건이 또 다시 발생하면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기술에 과도하게 의존하기보다 자신의 삶을 통제할 줄 아는 습관을 들이는 게 중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대학생 이기쁨 씨(20·여)는 “한 달 전부터 SNS를 모두 지웠는데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꼭 필요한 연락만 취하게 돼 더욱 삶이 편안해졌다”고 말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현실적으로 기술에서 벗어난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스스로 휴대전화 사용을 조절할 줄 아는 훈련이 필요하다”며 “사회적으로도 이런 생활이 용인되는 정책과 법안이 확산돼야 한다”고 말했다.

구특교 기자 koot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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