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지위 인정 소송을 낸 이란인 모하미(가명·62) 씨는 2010년 3월 법정에 출석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한국어를 전혀 못 했던 모하미 씨는 ‘2010. 3. 25 16:00 제1별관 202호 법정’이란 법원 통지서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통역인과 법원 앞에서 만나 함께 법정으로 가기로 했지만 몇 시간을 기다려도 통역인은 아무 연락 없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손짓 발짓으로 주변에 도움을 청해 법정에 도착했을 때 재판은 이미 끝나 있었고, 소송은 종결됐다. 현행법은 당사자가 세 차례 법정에 무단으로 불출석하면 소송을 취하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모하미 씨는 법원 통지서를 법무부 산하 출입국·외국인청에서 온 면담 관련 서류로 착각하는 등의 이유로 이미 두 차례 법원에 나가지 못한 상태였다.
이후 비자가 만료돼 불법체류자가 된 그는 2014년 4월부터 1년 동안 외국인보호소에 머물렀다. 법무부는 2015년 5월 그를 인도적 체류자로 인정했다. ‘기독교로 개종한 사실이 알려져 이슬람 국가인 고국에 돌아가면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모하미 씨의 주장에 신빙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모하미 씨는 매년 인도적 체류 자격을 갱신하면서 국내에 머물고 있다.
난민 신청자들에게 법원은 ‘최후의 보루’다. 법무부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외국인들이 이에 불복해 법원 판단을 구한다.
하지만 난민 신청자들에게 소송은 거대한 벽이다. 급하게 고국에서 빠져나오느라 빈손으로 한국에 도착한 사람들은 돈도 없고, 의사소통도 안 돼 도움을 받지 못한다. 더욱이 재판 관련 모든 서류는 번역본 없이 한국어로만 통지된다. 이렇다 보니 ‘나 홀로 깜깜이 소송’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난민 인정 소송을 냈던 에티오피아 출신 A 씨(34)는 지난해 2월 소송비용을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각하 결정을 받았다. A 씨가 소송비용인 인지대와 송달료 액수를 바꿔서 납부한 데다 납부 영수증도 법원에 제출하지 않은 탓이었다. 법원은 소송비용을 내라고 재차 통지했지만 A 씨는 이를 이해하지 못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항소 기한이 2주간이라는 것을 몰라 뒤늦게 법원을 찾는 사례도 있다. 1심에서 패소한 태국인 B 씨는 올 6월 판결문을 받았다. 맨 뒷장엔 3mm 남짓한 작은 글씨로 ‘판결에 불복할 경우 2주 안에 원심 법원에 상고장을 송부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는 행정사에게 판결문 한 장당 3만 원씩 주고 번역을 맡겼지만 행정사는 안내문만 있는 마지막 장을 빼고 번역해 줬다. 서울행정법원의 한 판사는 “난민 사건에서는 유독 기한을 넘겨 항소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이렇다 보니 난민 신청자가 변호사 없이 소송을 벌여 전국 1심 법원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은 사례는 최근 5년간 1건도 없다. 같은 기간 1심에서 난민 인정된 53건은 모두 변호사의 조력을 받은 경우였다. 국가인권위원회는 법원에 영어나 아랍어 등 각국 언어로 통지문을 번역하라고 권고하는 방안 등을 검토하고 있다고 17일 밝혔다.
난민인권센터 김연주 변호사는 “재판에 출석하지 않는 난민 신청자들에 대해 ‘체류 기간을 연장하려고 소송을 낸 것 아니냐’고 보는 시각이 있다”며 “하지만 실제로는 법원의 통지를 이해하지 못해 출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서울행정법원 관계자는 “소송 진행 상황을 영문 등 문자메시지로 알릴 수 있도록 시스템 개선을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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