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국어 31번 논란’이 일었던 올해 대학수학능력시험 이후 교육계에서는 국어에 대한 위기감이 팽배하다. 학생과 학부모들은 앞으로의 입시 준비를, 현장 교사와 국어학계에서는 국어 교육의 방향성을 우려하는 모양새다.
국어 교육이 새삼 화제로 떠오른 최근 서울 종로구 가회동 ‘건명원’에서 배철현 건명원장(56·서울대 종교학과 교수)을 만났다. 건명원은 문화예술 분야의 창의적 인재 양성을 목표로 설립된 기관이다. 인문 예술 과학 분야의 저명한 교수 8명이 19세부터 29세 사이의 청년들에게 융합적 강의를 무료로 제공한다. 15일 건명원의 2대 원장이 된 배 원장은 “내년부터 건명원의 모든 교육을 ‘글쓰기’ 중심으로 완전히 바꿀 생각”이라고 말했다. ―왜 글쓰기인가.
“내년이면 한국에도 넷플릭스가 본격적으로 들어온다. 애플도 드라마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위협적이다. 이들의 위세에 한국의 많은 방송이 위협받을 것이다. 그런데 애플이나 구글, 넷플릭스와 같은 기업들이 누굴 찾냐면 글 쓰는 사람이다. 그냥 쓰는 게 아니고 글을 깊이 있게 쓰는 사람, 높은 경지에서 쓰는 사람, 상상을 통해 쓰는 사람을 찾는다. 미래의 핵심 산업은 ‘스토리’다. ‘해리포터’라는 작품 하나의 경제적 가치가 어지간한 대기업 자동차 생산으로 얻는 이익보다 더 크다고 하지 않나. 그런데 이런 엄청난 미래 산업을 대한민국이 교육하지 않는다.
―우리 교육의 문제가 뭔가.
“중고교생들은 내가 아는 작은 세계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깊이 책을 읽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런데 현재 대한민국의 교육 제도로는 책 한 권도 못 읽는다. 한 권을 ‘읽는다’는 것은 그냥 읽는 게 아니라 ‘깊이 있게’, 단순히 많이 읽는 게 아니라 고전과 같은 좋은 책을 사고(思考)하면서 읽는다는 의미다. 세계의 저명한 대학들이 교육을 논할 때 흔히 ‘교양도서 100권을 읽는 것이 대학 교육의 전부’라고 하지 않나. 자신만의 글쓰기를 위해서도 폭넓은 양서의 독서가 이뤄져야 한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독서도, 글쓰기도 전혀 되지 않고 있다.” ―그런 교육은 어떤 결과를 낳나.
“학생에게는 ‘희망’이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 희망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어떤 것이어야지, 남이 희망이라고 만든 걸 찾는 건 흉내고 자살행위일 뿐이다. 그런데 한국의 청년들을 보면 상당수가 공무원을 하겠다며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한다. 만약 이들이 다양한 독서를 했다면 어땠을까. 책이란 스스로 되고 싶은 나를 찾도록 자극시켜 주는 등대와 같다. 독서를 통해 세계관이 확장되고 미래에 대한 무기를 갖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독서조차 입시를 위한 수단으로 보기 때문에 깊이 보질 못한다.”
―입시라는 현재의 틀에서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데….
“몇 년 전 서울대 총장에게 서울대 입시를 고전 50권 깊게 읽기와 에세이 쓰기, 면접으로 바꾸자고 말한 적도 있다. 대입 시험 문제(수능)를 방송국(EBS)에서 한 내용으로 낸다는 게 과연 맞는 얘긴가. 학생들에겐 각자의 목소리가 있다. 답은 다 달라야 한다. 내 목소리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노래할 때 가장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노래가 나온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다른 노래를 부를 수 있게 가만 놔두질 않는다. 방탄소년단(BTS)을 보라. 스스로 생각해서 가사를 쓰는 게 중요한 것이다.” ―독서와 글쓰기를 하면 교육이 변화할까.
“교육은 물론이고 사회도 바뀐다. 독서는 일종의 ‘침묵 수련’이다. 나의 말을 하지 않고 읽기를 통해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의 생각이 생기고 토론을 할 수 있는 역량도 생긴다. 그런데 독서가 없다 보니 학생들에게 토론을 시키면 상대의 말은 듣지 않고 자기가 가진 알량한 지식만을 과시하고 싶어 한다. 사회적으로도 보라. 한국의 많은 문제는 깊이 생각하고 토론을 통해 결정할 일인데 그 시스템이 무너졌다. 흔히 우리 사회가 한 단계 도약해야 한다고 논할 때 정치·경제만 말한다. 하지만 정치·경제의 변화는 국민 의식이 먼저 도약해야 가능한 것이다. 글쓰기란 생각나는 것을 글로 쓰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고, 자신의 글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때를 생각해 다른 사람의 입장에도 서보는 배려의 과정이다. 그런 면에서 글쓰기는 우리 교육과 사회를 구원할 가장 좋은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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