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호 씨는 여간해선 애정표현을 하지 않던 ‘부산 남자’였다. 새벽까지 소주를 마시며 고민을 나눴던 9월 22일 이영광 씨는 창호에게서 처음으로 “친구야 사랑한다, 고맙다”는 말을 듣고 감격했다. 하지만 사흘 뒤 창호는 만취한 운전자가 몰던 차량에 치였고, 다시는 창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 10명의 친구가 해낸 ‘음주운전 처벌 강화’
그가 사경을 헤매다 세상을 떠난 지 20일 만인 11월 29일 음주운전 치사상 처벌을 강화하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고, 12월 7일에는 음주운전 단속 기준치를 낮추는 도로교통법 개정안도 국회를 통과했다. 이른바 ‘윤창호법’이 제정된 것이다. 음주운전 단속 시 혈중 알코올 농도 기준치를 현행 0.05%에서 0.03%로 낮추고, 음주운전 중 사망 사고를 낼 경우 현행 1년 이상 유기징역에서 3년 이상의 유기징역 또는 무기징역으로 형량을 높인 것이 핵심 내용이다.
특정범죄가중처벌법에 위험운전치사상 조항이 도입된 것은 2007년이다. 교통안전 전문가들은 당시부터 처벌 수위가 약하다고 지속적으로 지적했지만 법 개정은 번번이 무산됐다. 그런데 윤 씨의 친구들이 3개월 만에 어려운 일을 해냈다.
윤 씨 친구 10명이 처음 한자리에 모인 것은 윤 씨 사고 당일인 9월 25일 부산 백병원 중환자실 앞이었다. 친구들은 윤 씨를 이렇게 만든 사람이 어떤 처벌을 받는지 검색해봤다. 대부분 집행유예를 받거나 1, 2년 복역한 뒤 풀려난다는 사실을 알고는 분노했다. “음주운전 사고 뉴스를 접할 때마다 분노했지만 금세 잊었어요. ‘그때 행동했다면 창호가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에 많이 후회했습니다.”(이영광 씨) 윤 씨의 희생을 헛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친구들은 머리를 맞댔다.
○ “실제 처벌 강화되는지 지켜볼 것”
위중한 윤 씨를 두고 멀리 갈 수는 없었다. 중환자실 앞 복도에 담요를 깔고 음주운전 관련 법 공부를 시작했다. “법을 잘 몰랐고 국회에는 가본 적도 없었어요. 양형기준과 판례를 연도별로 분담해 정리했습니다. 한 걸음 떼기가 너무 힘들었어요.”(박주연 씨) 청와대 국민청원을 올리고 ‘윤창호법’ 초안을 국회의원 299명 전원에게 보냈다.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두 달간 전국을 다니며 윤창호법을 홍보했다. 법안 통과를 위한 서명도 받았다.
결과는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윤창호법 원안은 음주운전으로 사망 사고를 낼 경우 사형,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이 가능하도록 했다. 살인죄의 최소 형량이 5년이기 때문에 음주운전은 살인과 마찬가지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국회 심사 과정에서 3년 이상의 유기징역 또는 무기징역으로 후퇴했다. “5년 하한선만은 지켜지기를 바랐어요. 3년이면 재판부가 부담 없이 집행유예를 내릴 수 있으니까요. 그때가 제일 많이 속상했어요.” 친구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이들의 다음 목표는 법이 개정된 만큼 앞으로 사법부가 어떤 판결을 내리는지 지켜보는 것이다. 처벌 수위가 실제로 높아지는지 감시하면서 법안에 수정이 필요한 부분이 있는지 살펴볼 예정이다. 음주운전 처벌 관련 세미나에도 적극 참가하겠다고 밝혔다. 내년 활동을 위해 음주운전 예방과 피해자 애도를 뜻하는 ‘음주 근절 배지’도 판매하고 있다. “윤창호법으로 단 한 명이라도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가면 그것만으로도 정말 값진 일이라고 생각해요. 자부심을 갖고 창호를 기억하며 살겠습니다.”
○ 갈 길 먼 교통안전사회 실현
음주운전 처벌은 강화됐지만 교통안전사회 실현을 위한 과제는 아직 많다. 전문가들은 대표적으로 ‘음주운전 시동잠금장치’ 의무화, 교통사고처리특례법 폐지 등을 꼽는다. 시동잠금장치 의무화는 상습 음주운전자의 차량에 음주 측정 장치를 설치해 음주 상태에서는 시동이 걸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2017년 더불어민주당 김영호, 자유한국당 송희경 의원이 이를 반영한 도로교통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아직 통과되지 않았다. 지난달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는 경찰청 등의 연구와 공청회를 거쳐 내년 3월까지 법안을 처리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교통사고처리특례법 폐지는 ‘보험 처리하면 그만’이라는 교통사고에 대한 안이한 법 인식을 없앨 것으로 기대된다. 교특법은 피해자가 사망·중상해를 당하지 않거나, 횡단보도에서의 사고, 중앙선 침범 같은 12대 중과실이 아닌 모든 교통사고의 가해자가 종합보험에 가입한 경우 법적으로 책임을 묻지 않도록 하고 있다. 세계에서 유일한 ‘가해자 보호법’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바른미래당 소속인 주승용 국회 부의장이 내년 중 폐지를 목표로 관련 법안을 마련 중이다.
이 밖에 아파트 단지, 주차장 같은 ‘도로 외 구역’에서의 교통사고 예방과 피해자 보호를 위한 법안 마련도 속도를 내고 있다. 이를 반영한 민주당 민홍철 의원의 도로교통법 개정안 등이 국회에 계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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