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클릭!재밌는 역사]3인의 리더, 혼란했던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2월 26일 03시 00분


일본의 통일과 정치적 리더십

일본은 정말 ‘가깝고도 먼 나라’입니다. 경제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여행도 많이 합니다. 그러면서도 복잡한 역사와 독도 문제로 감정의 골이 깊습니다. 오늘은 일본 전국시대 통일에 기여한 세 명의 인물과 그들이 보여준 정치적 리더십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해서는 일본인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도 관심이 많습니다. 이 세 명의 이야기는 소설과 드라마 소재로 계속 사용되고, 그들이 보여준 정치적 리더십과 성과를 두고 계속 재평가 작업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 기존 권위를 부정하고 새 질서를 확립한 오다

오다 노부나가(1534∼1582)는 두 살 때 현재 나고야 지역의 성주가 되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기묘한 행동을 많이 했습니다. 말타기, 수영, 창 대련 등으로 하루를 보내고 옷에 부싯돌 주머니 등을 주렁주렁 달고 다녔습니다. 반면 동생은 매우 총명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죽은 후 후계구도를 놓고 갈등이 일어났고, 결국 전쟁을 통해 동생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오다는 전국시대 혼란을 극복하고 통일 대업을 대부분 완성한 인물입니다. 그가 통일 과정에서 보여준 정치적 리더십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기존의 권위와 세력들을 과감하게 부정했습니다. 특히 종교와 정치 영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천태종의 본산 엔랴쿠지와 잇코슈의 중심지 혼간지를 정복했습니다. 기존 불교 세력을 정복하고 탄압한 반면 예수회 선교사들은 보호했습니다. 교토에 교회를 세우고 아즈치의 신학교 건립을 후원했습니다.

둘째, 가문에 얽매이지 않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했습니다. 미천한 가문 출신인 도요토미를 등용하고 외국인도 자신의 군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셋째, 각 방면에서 혁신적인 정책을 도입했습니다. 특히 조총을 도입해 새로운 전투 방식을 적용했습니다. 사원이 소유한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하고 광산 개발, 도로 정비, 화폐 사용 등의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오다의 리더십은 ‘창조적 파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혼란한 시대에 기존 질서를 해체하고 창조적으로 새로운 질서를 수립했습니다.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면 기존 질서를 파괴해야 합니다.

○ 평범한 백성의 아들에서 천하를 호령한 도요토미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한 인물입니다. 임진왜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싫어하는 인물이고, 그 영향으로 객관적인 평가가 어렵습니다. 도요토미는 미천한 가문 출생으로 태어난 연도가 정확하지 않고 성장 과정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도요토미는 오다 아래에서 하위직 보병으로 출발하였고, 혁혁한 공을 세워 30대 초반에는 주요 가신으로 성장했습니다. 1582년에는 오다를 배신한 아케치 미쓰히데를 공격해 처단했습니다.

도요토미는 오다의 정책과 노선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먼저 농민, 수공업자, 상인의 무기 사용 및 휴대를 금지하고 무사, 농민, 수공업자, 상인의 신분제를 엄격하게 구분했습니다. 또 오다가 일왕이나 불교 세력과 거리를 둔 반면 도요토미는 일왕의 존재를 인정하고 조정에 접근했습니다. 일왕으로부터 높은 벼슬을 받고 전통 권력과 타협을 모색했습니다. 또 불교 세력과 타협하고 기독교의 선교 활동을 탄압했습니다. 무엇보다 임진왜란을 일으켰습니다. 그가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개인적 공명심과 함께 부하들에게 영토를 분배해야 하는 정권 구조 등으로 설명됩니다. 분명한 점은 이 전쟁이 양국 모두에게 엄청난 피해를 준 무모한 전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도요토미는 평범하게 태어났지만 세상에서 출세하고 싶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주군에 대한 충성심, 총명하고 민첩한 행동, 군사적 수완 등이 뛰어난 인물입니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한 이후 판단력이 흐려졌고 자신을 잘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 때를 기다리며 세력을 키운 도쿠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는 세력이 약한 무사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일곱 살 때 유력한 무사 가문의 인질이 되었고, 그곳에서 결혼해 아이를 키웠습니다. 다행히 자신을 인질로 잡은 가문이 멸망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영주가 되었습니다. 그는 오다와 동맹을 맺고 자신의 기반을 튼튼히 하면서 세력을 키웠습니다. 또 자신보다 강력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전쟁을 하다가 결국 충성을 맹세하고 동맹을 맺었습니다.

도쿠가와의 정책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도요토미가 일본 남서부의 다이묘들을 정복하고 오사카성을 건설한 반면 그는 일본 동북쪽으로 진출했습니다. 특히 한적한 어촌이었던 에도(현재의 도쿄)에 자신의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자신의 정예부대는 영지 외곽과 주요 도로에 배치하고 약한 군대는 에도 가까이에 두었습니다.

둘째, 농업 생산력 향상과 백성의 생활 안정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토지 조사를 실시해 공정하게 세금을 물렸습니다. 자신이 건설한 도시에 수공업자와 상인을 불러 모았고, 주민들의 식수 공급을 위해 토목공사를 벌였습니다. 셋째, 임진왜란에 참전하지 않았습니다. 도요토미의 부하들은 임진왜란에 참전하였으나 자신의 부하들은 자신의 영지에서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고 농업 생산력을 높이도록 했습니다. 그는 도요토미가 죽자 자신의 세력을 거느리고 천하를 평정하고 에도 막부를 건설했습니다.

도쿠가와는 2인자가 살아남는 방법을 잘 알려줍니다. 때를 기다리며 자신의 기반을 차분히 다진 후 기회가 왔을 때 경쟁자를 제거했습니다. 보통 오다는 ‘창업자 유형’, 도쿠가와는 ‘후계자 유형’이라고 평가합니다.

어느 시대나 국가와 기업은 리더십을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은 세 명 중 어떤 리더십이 마음에 드나요? 여러분도 이들의 리더십에 관심을 갖고, 자신의 삶의 태도와 목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이환병 서울 용산고 교사
#일본의 통일#정치적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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