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참고서 점자화 규정 있지만 불법유통 등 우려 디지털파일 안줘
책 내용 다시 입력… 오류도 많아, 美 등 선진국선 파일 제공 의무화
“시각·시청각장애 학생들이 겪는 상황은 매년 비슷해요. 교과서는 여름방학이 다 돼야 받아요. 참고서는 지문과 문제가 뚝뚝 잘린 채 분책이 돼서 와요. 수학 참고서는 오·탈자투성이라 아예 문제 자체가 달라지기도 하고요.”(맹학교 학부모 A 씨)
한국의 특수교육 제도는 과거보다 나아졌다지만 국내 시각·시청각장애 학생들에게 ‘학습권’이란 여전히 먼 얘기다.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학업의 기본이 되는 점자로 된 책이 없어서다. 국내 시각·시청각장애 학생들은 교과서조차 비장애인 학생들과 같은 시기에 제공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규정상 정부가 교과서와 참고서를 점자화해 제공해야 하지만 실제 점자책을 받기까지는 최장 1년이 걸린다. 왜 그럴까.
30일 점역(點譯)업계에 따르면 일반 책을 점자로 만들려면 텍스트파일이 필요하다. 하지만 파일의 불법 유통 및 저작권 침해를 우려하는 국내 출판사들은 민간 점역업체는 물론이고 국가기관인 국립특수교육원에조차 텍스트파일을 제공하지 않는다. 특수교육원 관계자는 “공공기관인 EBS마저 EBS 대학수학능력시험 문제집 텍스트 파일 전부를 받는 것은 어렵다”며 “이 때문에 모든 책 내용을 일일이 손으로 친 다음 점자책을 만들다 보니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반면 선진국에서는 점자책 제작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용도라면 출판사는 반드시 책의 텍스트파일을 점역업체에 제공해야 한다. 미국처럼 지식재산권 침해 규정이 엄격한 나라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에선 전체 출판물의 10%가량이 바로 점자책으로 제작돼 시각·시청각장애인들에게 제공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국내 관련법에선 출판사들에 사회적 약자를 위한 디지털파일 제공을 강제하지 않아 점자화가 매우 어렵다. 점역업체 B사 대표는 “학부모들은 점자책이 빨리 나오지 않는다고 항의하는데, 출판사들은 파일을 주지 않으니 점역업체만 미칠 노릇”이라며 “출판사 앞에서 1인 시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토로했다. 점역 환경이 이처럼 열악하다 보니 올해 초 특수교육원이 두 번이나 관련 입찰을 진행했으나 응찰한 업체가 없어 결국 B사와 수의계약을 맺어야 했다.
매년 전년도 10∼12월 중 이뤄지는 다른 공공기관의 점역사업 입찰과 달리 교육부 입찰이 매년 신학기에 이뤄지는 점도 문제로 꼽힌다. 한 점역업체 관계자는 “하다못해 자치구 소식지도 새해가 시작되기 전에 입찰을 하는데 교육부 입찰은 3월에야 진행된다”며 “이때부터 교과서와 참고서 점역을 시작하니 시각·시청각장애 학생들에게 늦게 제공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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