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교육계가 줄기차게 요구해 온 핵심 사안이다. 진보진영은 “국가 주도의 교과서 발행·심사는 더 이상 시대와 맞지 않는다”며 “빠른 사회 변화와 다양한 가치를 반영할 수 있도록 교과서 제작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펴 왔다.
특히 박근혜 정부가 검정 교과서의 좌 편향성을 문제 삼아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부의 교과서 검정 영향력을 줄이라’, ‘초등 사회 교과서도 검정화하라’는 진보 측 요구가 커졌다. 문재인 정부는 이를 반영해 국정과제로 점진적 교과서 자율발행제 도입을 내걸고 ‘교과서의 민주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 심의기준 대폭 완화-‘모험’ 지적도 3일 교육계에 따르면 교육부는 최근 교과서 심사진에 올해부터 심사 방식을 바꾸라고 지시했다. 검정 교과서 심사 제도를 단순화해 1, 2차로 분리돼 있던 본심사를 하나로 통합하는 한편 심사진의 수정 ‘지시’를 ‘요청’으로 바꿔 집필진의 판단에 따라 수정을 거부해도 심의를 통과할 수 있게 된 게 골자다. 기존에는 각 출판사가 검정 심사에 통과하기 위해 심사진의 수정 지시·권고를 반드시 반영했다.
교과서 업계의 한 관계자는 “현재 심사진이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2020년 학교에 배포될 새로운 중3 검정 교과서를 심의 중”이라며 “출판사나 집필진의 부담은 줄었는데 심사 쪽에서는 기존과 다른 시행계획이 내려와 당혹해 했다”고 말했다.
과거 심사 경험이 있는 한 교육계 관계자는 “정치적 가치가 충돌하는 사회과 과목은 물론이고 수학이나 과학처럼 오류 없는 지식 전달이 중요한 과목도 문제가 될 수 있다”며 “집필진에게 자유를 보장한다며 정부가 교육적 모험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 과학계 인사는 “진화론과 창조론이 있는데 창조론자들이 창조론 위주로 교과서를 집필하고 맞다고 생각하면 한쪽으로 치우친 교과서가 그냥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 검정 ‘다양성’ vs 국정 ‘안정성’
초등 3∼6학년의 사회, 수학, 과학 교과서를 검정화하는 것에 대해서도 교육계 의견이 엇갈린다. 검정 교과서 확대를 지지하는 쪽에서는 단일한 국정 교과서에 비해 여러 출판사가 펴내는 검정 교과서가 질적으로 우수할 것이라고 본다.
교육부는 “검정 교과서는 국정 교과서에 비해 권당 개발 투자비용이 2∼3배 높고, 여러 출판사가 경쟁하는 구조라 학부모들의 다양한 선택권을 보장할 수 있다”고 밝혔다. 박남기 광주교대 교수는 “일본 등 다른 여러 나라 역시 검정 교과서 체제”라며 “교사들의 질이 전반적으로 높고, 여러 교수학습 자료를 쓰려는 의욕이 높으며, 교육과정 결정권이 교사에게 있는 3박자가 맞아떨어지면 검정 교과서의 효용성이 높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 국정 교과서 집필 경험이 있는 A 교수는 “교사들의 역량이 제각각인 현실에서 국정 교과서마저 없으면 수업 내용이 천차만별일 가능성이 있다”며 “미국에서도 이로 인해 교육격차 등 부작용이 나타난 게 사실”이라고 전했다. 또 다른 집필진은 “초등학교에서 배워야 할 내용은 핵심 개념 위주인데 검정 교과서가 여러 종 나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차라리 국정 교과서를 핵심 개념 위주로 가볍게 만들고 교사들이 활용할 수 있는 교수 자료를 풍부하게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 초등교육 정치색 갈등 우려
무엇보다 교육계에서는 초등 교과서의 검정화 과정에서 초등교육마저 정치진영 논리에 빠지지 않을까 우려한다. 출판사별 정치적 색채나 학습량 정도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 과목에 대한 우려가 크다. 사회 과목에는 중고교의 역사 과목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다. 박근혜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쟁 과정처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자유) 민주주의’ ‘6·25 남침’ 등 미세한 단어 하나하나를 둘러싼 갈등이 재연될 수 있다.
초등학교 검정화 과목에 수학과 과학이 포함된 것도 주목되는 대목이다. 이 과목은 진보교육계가 ‘학습량이 많고 어렵다’며 문제를 제기해왔던 대표적인 과목이다. 교육계의 한 관계자는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서가 아직 현장에 모두 적용되지도 않았는데 심의기준을 바꾸고 또 새 교과서를 만들라는 꼴”이라며 “정권 스케줄에 맞춰 급해도 너무 급하게 간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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