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남편은 영화광, 배우 아내는 클래식 마니아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5일 03시 00분


[절친 커플]<1>백건우-윤정희 부부

결혼 전 보금자리였던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 밑 옥탑방을 오랜만에 찾은 백건우(왼쪽)-윤정희 씨 부부. 백건우 씨가 “아내가 저 집에서 처음 끓여준 수제비가 생각나요. 워낙 맵게 만들거든요. 어찌나 맵던지”라고 농을 던지자 윤정희 씨는 “말이 돼? 수제비에 왜 매운 게 들어가”라고 웃으며 반박했다. 둘은 친구처럼 서로를 의지하고 응원하며 일흔이 넘은 지금도 활발한 예술 활동을 하고 있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
결혼 전 보금자리였던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 밑 옥탑방을 오랜만에 찾은 백건우(왼쪽)-윤정희 씨 부부. 백건우 씨가 “아내가 저 집에서 처음 끓여준 수제비가 생각나요. 워낙 맵게 만들거든요. 어찌나 맵던지”라고 농을 던지자 윤정희 씨는 “말이 돼? 수제비에 왜 매운 게 들어가”라고 웃으며 반박했다. 둘은 친구처럼 서로를 의지하고 응원하며 일흔이 넘은 지금도 활발한 예술 활동을 하고 있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
《 ‘절친 커플’(We are Best-Friends Forever).

저출산·고령화 시대,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해야 한다는 ‘3포 세대’를 넘어 모든 게 회색빛인 ‘n포 세대’까지 거론되는 시절. 그래서 외롭게 오래 살 가능성이 점점 더 커지는 세상.

사람 인(人)은 사람의 모습을 본떠 만든 글자다. 두 사람이 서로 기대고 있는 모습 같다는 이가 많다. 그렇다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데 가장 필요한 건 사람이다. 슬프고 화날 때 기댈 수 있고, 기쁘고 즐거울 때 함께하고 싶고, 나의 터무니없는 말에도 귀 기울여주는 사람. 그런 좋은 친구 한 명만 곁에 있다면 힘겨운 인생조차 힘내서 살 만하지 않을까.

동아일보는 의지하고 다독이며 서로의 가장 친한 친구(절친·Best-Friend Forever)로 살아가는 커플 이야기를 독자와 함께 나눈다. 첫 번째 절친 커플은 프랑스 파리에서 45년째 살고 있는 백건우-윤정희 씨 부부. 》

“여기 어디쯤인데…”

지난해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오후의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 밑 도르셀 거리. 백건우의 발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번지수가 ‘50’이라고 쓰인 문 밑에 선 그는 “여기다 여기. 이 복도 지나서 4층 옥탑방으로 올라갔어”라고 외쳤다. 무릎 관절이 불편해 빠른 걸음이 힘든 윤정희가 뒤를 따르며 “정말 여기 맞아?”라고 했다.

2019년은 둘이 처음 만난 지 45년이 되는 해다. 1974년 파리에서 만나 불같은 사랑에 빠진 두 사람.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채 좁은 옥탑방에서 첫 보금자리를 꾸몄다고 했다.

백건우가 윤정희를 보며 말했다. “기억나? 대사관에 근무하던 영사가 집 대문 앞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하면 일부러 다른 곳에 내려달라고 했잖아. 그리고 몰래 이 집으로 돌아오곤 했지.”

1967년 ‘청춘극장’으로 데뷔해 7년 동안 영화 300편을 촬영하며 최고의 전성시대를 구가하던 윤정희. 그는 1974년 영화공부를 하겠다며 돌연 한국을 떠나 프랑스 소르본대(현 파리 3대학)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백건우는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새로운 무대인 유럽에서 활동하기 위해 친구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 둘은 이제 일흔이 넘었다. 노부부라고 불릴 나이. 하지만 둘의 사랑은 여전히 달콤하고 뜨거웠다. 윤정희가 몽마르트르 집 앞에서 “춥다”고 속삭이자 백건우는 주저 없이 거리 한가운데임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꼭 안았다.

1974년 당시 이미 국내 최고의 여배우, 유명 피아니스트였던 두 사람. 그런 당대의 톱스타들이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하늘 아래 단 두 명. 본인들뿐이었다. 동거는 물론 연애 사실조차 한동안 비밀로 유지됐다.

동거를 먼저 제안한 건 백건우였다.

“뉴욕에서 공부할 때 봤던 영화 ‘몽쁘띠’(내 사랑)가 생각났어요. 파리 몽마르트르에서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영화죠. 몽마르트르가 피카소와 조르주 상드 등 예술가들의 동네잖아요. 그냥 길을 지나가다 이곳이 마음에 들어 무작정 들어가 방이 있냐고 물었더니 마침 있는 거예요. 참 허름한 단칸방이었지만 자유롭고 로맨틱했어요. 저녁이 되면 몽마르트르 언덕 위 사크레 쾨르 성당에 올라가 해 지는 모습을 보곤 했죠.”

1975년 5월경 한국 언론에 두 사람의 연애 사실이 처음 알려졌다. 약혼설, 결혼임박설 등 갖은 소문이 난무하면서 유명세에 따른 홍역을 치렀다.

(백)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이 사람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 있었어요. 그 때문에 겁을 먹어 집안에서 반대를 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우리 둘의 관계는 한 번도 변했던 적이 없죠.”

(윤) 정말 이해가 안 가는 일이죠. 만나본 적도 없는 분을. 당시에 저희 집에서 청와대까지 연결되는 터널이 있다는 소문도 있었어요. 저희 집이 여의도인데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요.”

둘은 1976년 3월 파리에서 결혼했다. 몇몇 지인만 초대한 채 전통 한복을 입고 소박한 혼례를 올렸다. 이후 둘은 40년째 파리 외곽 뱅센 숲 근처의 집에서 살고 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백건우가 집 앞 빵집에서 바게트부터 사 온다. 그 사이 윤정희는 집에서 커피를 끓인다. 하루 한 끼는 반드시 한식을 챙긴다. 백건우는 1주일에 세 번, 집 앞에 서는 장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한다. 이때가 두 사람이 하루 중 유일하게 떨어져 있는 시간이다.

(윤) 결혼 후부터 우리 집의 김치는 다 내가 담근 거예요. 한국에서 가져온 고추장, 고춧가루, 된장으로 음식을 하죠. 맛있어요. 남편도 손재주가 좋아서 요리는 잘해요. 자기, 장 보는 거 좋아하잖아.”

(백) 여기저기 다니면서 먹어보니까. 집에서도 비슷하게 만들어 보는 거 좋아해요. 요리책 보고는 전혀 못 해요. 그냥 감으로. 집 앞에 열리는 장은 우리가 40년 단골이잖아요. 어쩔 때는 막 붙잡아. 이쪽(아내가)이 감을 좋아하거든요. 계속 사니까 어떨 때는 한 궤짝씩 팔려고 해요. 엄청 무거운데 그걸 힘들게 가져가면 그걸 다 먹어.”

지금도 백건우는 한 달에 한두 차례 세계를 돌아다니며 공연을 한다. 지난달 스페인 말라가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7일부터 다시 스페인 북부 팜플로나와 빌바오에서 공연할 예정이다. 해외 공연이라고 다를까. 둘은 늘 함께한다.


―하루 종일 집에서 두 분이 뭘 하십니까.

(백) 집에 있을 때는 늘 연습해요. 두 가지죠. 다음 음악회를 준비하는 연습과 나의 음악 세계를 탐구하는 작업 두 가지입니다. 항상 숙제는 많아요. 제 자신이 만드는 숙제죠. 게을러지면 안 되거든요.”

(윤) 건우 백(서양식 순서로 부르는 이름이 가끔 튀어나온다)이 4층에서 연주하면 저는 그 밑층에서 그 연주를 들으며 책을 읽습니다. 이 사람은 연주 전에 항상 저 혼자를 두고 관객이라고 생각하고 리허설을 해요. 저는 그 시간이 가장 행복해요. 저만의 시간이니까요.”

(백) 그 리허설을 통해 청중이 내 공연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프로그램 순서 배치는 괜찮을까 확인하죠. 이쪽도 작품 생활을 한 사람이니까 알죠. 아이디어가 옳게 만들어졌는지, 곡의 비중은 맞는지. 평가가 아주 엄격해요. 빈틈을 보이면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자기가 아니야’.”

(윤) 제가 어릴 때부터 음악 속에서 살았어요. 성악 전공을 한 동생도 있고. 5남매인데 나 빼고 모두 피아노를 칠 줄 알죠. 나도 영화 촬영할 때 다른 사람이 찍을 동안에는 차에 들어와서 늘 클래식을 들었거든요. 저는 클래식 없이는 못 살아요.”

연습이 끝나면 저녁에는 3층으로 내려와 DVD로 함께 영화를 본다. 백건우는 연주를 하러 갈 때면 반드시 시간을 내 그 나라 영화 DVD를 사오는 취미를 갖고 있다.

―영화 볼 때 선택권은 주로 누구에게 있나요.


(윤) 주로 저 사람이 골라요. (백건우가 졸업한) 줄리아드음악원 친구들을 만나보니 영화 볼 때 다들 ‘건우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래요. 중국 멕시코 체코 폴란드 등에서 희귀한 영화를 많이 구해 봅니다. 하도 영화를 좋아해서 내가 묻죠. ‘당신 영화 좋아해서 영화배우랑 결혼했어?’ 처음 만났을 때는 영화감독이 꿈이라고 해서 그럼 저랑 ‘바이’라고 말했죠.”

(백) 저는 B급 영화도 가리지 않고 질 낮은 영화도 일단 틀면 이상해도 다 보는데…. 저 사람은 액션 영화보다 로맨틱하고 클래식한 영화를 좋아하고, 중간에 재미없으면 바꾸자고 해요. 영화배우라 저보다 엄격하죠. 그렇게 매일 영화를 봅니다.”

윤정희는 인터뷰 내내 “우리는 인생관이 같아요. 나는 클래식 없이 못 살고 저쪽은 영화 없이 못 살죠”라고 말했다. 한참 듣다보니 ‘별난’ 생활 패턴도 비슷했다. 두 사람의 오붓한 생활은 타인의 침해를 받을 일이 없었다. 결혼 후 미용실에 간 적이 없고, 차를 보유한 적도 없으며, 함께 광고를 찍은 적도 없다. 휴대전화도 둘이 합쳐 한 대다. 백건우는 미용 가위가 아닌 일반 가위로 아내의 머리를 잘라 준다. 자신의 머리도 거울을 보고 직접 손질한다.

―여배우가 미용 비전문가인 남편에게 머리를 맡겨도 되나요.

(윤) 왜요, 지금 머리 예쁘잖아요. 전 마음에 들어요. 미장원 가면 시간 아깝잖아요. 한국 가면 집으로 옛날 영화 찍을 때부터 도와준 언니가 와서 머리를 해줘요. 건우 백이 손재주가 좋아요. 요리도 잘하고, 사진도 잘 찍고.”

(백) 나는 일생 동안 이발소에 간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10대 때 뉴욕에서 간 게 마지막 같은데. 당시에는 비쌌고 동양인 머리를 잘 못 깎았어요.”

―결혼 후 한 번도 차를 가져본 적이 없나요?


(윤) 없어요. 저는 운전면허증도 없어요. 의사가 (말하기를) 피아니스트가 운전을 하면 팔에 무리가 가서 안 좋다고 해서. 저쪽(백건우)도 안 하죠.”

(백) 미국에서 공부할 때 면허증을 따긴 했지만 운전한 적은 거의 없어요. 파리에서는 더더욱 필요 없어요. 집 바로 앞에 지하철역이 있고, 주차하기만 힘들죠.”

여러모로 너무나 통하는 게 많은 두 사람 정말 궁금해졌다.

―정말 싸운 적이 없나요? 안 싸우는 비결이 있나요?


(윤) 의견충돌은 있죠. 그래도 1분 후면 끝나요. 우리 성격이…. 오래 못 가요.”

(백) 안 싸우는 방법이 뭐 있겠어요? 서로 존중하는 거죠. 둘 다 개성이 뚜렷해서 의견충돌은 있는데, 그래도 싸우다가 웃어요. 그러면 ‘지금 웃으면 안 되는데…’라고 말하고 또 웃죠.”

백건우의 왼손 넷째 손가락에는 지금도 늘 결혼반지가 자리한다. 결혼 43년 동안 한 번도 뺀 적이 없다. 공연을 할 때도 마찬가지. 윤정희의 왼손 넷째 손가락에는 묵주 반지가 있다. 가톨릭 신자 윤정희는 남편이 공연할 때마다 관객석 제일 뒷줄에 앉아 공연 내내 묵주 기도를 드리며 남편 공연의 성공을 기원한다.

평생 부부이자 누구보다도 가까운 친구인 두 사람은 결혼 예찬론자다.

(백) 결혼은 인간이 만든 게 아니라 하늘이 만든 법칙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모든 건 가족에서 시작되죠. 가족을 통해 사회가 형성되고 인류 역사가 만들어지는 거예요. 인간은 오직 어머니 배 속에서만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죠. 인간은 혼자가 아니라 짝이 있어요.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게 지금은 자유라고 착각할 수 있지만 언젠가는 허무하다는 걸 인생에서 느낄 겁니다.”

(윤) 두 사람이 살면서 서로 존경하면서 사랑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 건 아름다운 일이에요. 열심히 본인 자신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죠.”

윤정희는 결혼 후 은퇴한 여배우 트로이카 문희, 남정임과 달리 결혼 후에도 20편의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윤정희는 “모든 게 ‘건우 백’ 덕분”이라며 “하늘나라 갈 때까지 작품을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결혼 후 공연이 없을 땐 늘 윤정희의 촬영장을 쫓아다니며 내조해 온 백건우도 “결혼으로 직장을 그만두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결혼한 지 43년. 윤정희가 “세월이 너무 빠르다”고 하자, 백건우는 “그래도 다 때마다 새로운 맛이 있어. 50대, 60대, 70대 늘 그랬어. 우리가 느끼는 사랑이 다르지”라고 말했다.

―24시간 늘 함께 있는데, 혹시나 한 사람이 먼저 하늘나라로 가면 어떨까 생각하나요?


(윤) 자기는 해?”

(백) 나는 안 해.”

(윤) 나는 자기한테도 처음 이야기하는데 혼자서는 못 살 것 같아.”

(백)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그렇고 우리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잖아. 그걸 받아들이는 게 옳은 것 같아.”

(윤) 혼자는 못 살 것 같아. 그래도 만약 혼자가 된다면 수녀원 같은 데서 일하며 살아야겠다. 그런 생각은 가끔 해. 자기, 나보다 더 오래 살아.”


●백건우-윤정희 부부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백건우(73)는 미국 뉴욕 예술학교와 줄리아드음악원을 거쳐 부소니, 나움버그 등 각종 국제피아노콩쿠르를 휩쓸고 황금 디아파종상, 누벨 아카데미 디스크상 등을 받았다. 영화배우 윤정희(75)는 남정임, 문희와 함께 196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를 이룬 영화배우로 2010년 영화 ‘시’로 LA 비평가협회상 여우주연상을 받는 등 최근까지 왕성하게 활동해 왔다. 영화 330편을 촬영했고 대종상을 비롯해 여우주연상만 25번 받았다. 이 부부는 한국에서 은관문화훈장, 프랑스에서 문화 예술 공로훈장을 모두 받은 최초의 한국인 부부다. 문화예술계 최고의 로맨티시스트 부부로 유명하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
#절친 커플#백건우#윤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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