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역 뒤편 시간이 멈춘 듯한 동구 소제동. 개발을 앞두고 하나 둘 주민들이 떠나 황량해 보이는 동네 어귀에 대창이용원이라 쓰인 낡은 간판이 70년대를 연상케했다. 한 겨울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부산한 주변과는 달리 이곳에 들어서면 녹이 슨 연탄난로와 함께 이종완 이발사(82)가 따뜻한 온기로 맞는다. 어렸을 적에 아버지 손에 이끌려 이발소를 찾았을 때 봤던 낡은 의자와 흰 가운을 입은 이발사의 모습을 떠올리는 풍경이다.
이씨는 80을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미용가위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 처음 소제동에 자리 잡고 이발소를 하던 때와는 달리 발길이 많이 뜸해졌지만 멀리서 찾아주는 오랜 단골들과 담소를 나누는 것이 위안거리다.
“전성기 때와는 달리 지금은 찾는 사람이 적지만 그래도 아직 하루에 10~15명은 찾아주고 있어.”
그가 말하는 전성기는 1960~70년 소제동에 철도 관사가 들어서 있고 많은 학생들이 이용원 앞을 지나 등하교 하던 시절이다.
“기관사로 일하라는 제의도 받았었지. 근데 들어보니까 내가 버는 수입이 기관사 월급의 배가 넘더라구. 철도 직원들과 학생들, 손님이 많아서 다 상대하려면 하루 30여 명씩 며칠에 걸쳐 이발을 하기도 했었지. 직원 4명을 둬야 했을 정도였으니까.”
자식 3명을 모자람 없이 키우고 가정을 건사할 수 있었던 과거 얘기에는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이 씨는 “철도 직원들은 머리를 항상 짧게 해야 해서 이르면 10일에 한번 씩 찾아오곤 했다”고 좋았던 시절을 회상했다.
그는 가난해서 이발을 배웠다. 국민학교를 마치고 고향인 조치원을 떠나 14살의 어린 나이에 홀로 대전으로 왔다.
“돈 한 푼 없이 뭐라도 배워야겠다고 내려와 일을 배웠어. 임금도 주지 않고 구박도 많이 받았지만 끼니는 챙겨주니 군소리 않고 어깨너머로 기술을 익혔던 거지.”
무일푼 처지라 처음엔 그리운 고향에도 갈 수 없었다. 2~3년 정도 허드렛일을 하고 나서야 용돈을 조금씩 받기 시작해 고기 몇 근을 사들고 고향집을 찾았던 기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발 기술을 다 배우기까지는 5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배운 기술로 23살에 이발사 면허를 취득했다. 당시 소제동은 대전에서 세손가락 안에 꼽는 번화가였다. 이 씨는 “이왕 시작할 일, 사람 많고 돈 많은 곳에서 해보자”는 호기로운 마음에 소제동에 자리를 잡았다.
굶지 않으려 이발을 배워 이곳 소제동에서 보낸 역사가 어느덧 50년을 넘었다. 처음 소제동에서 이발소를 인수한 후 낳은 큰아들의 나이가 50이 넘었으니 반세기라는 긴 세월을 이발소와 함께 동고동락한 셈이다.
수많은 발길이 오가며 가장 오래된 이용원으로 ‘2016 대전 기네스’에도 오르고, 대전 여행 명소로 원도심 도보여행 코스에 들었다. 뜻하지 않게 쌓인 추억과 세월이 자랑거리로 남았다.
“10여 년 전부터 재개발 얘기가 나와서 개발이 시작되면 나도 가위를 놓아야지 싶었어. 그렇게 하루하루 기다리다 보니 어느덧 80이 넘어서도 가위를 놓지 못하고 있네.”
3년째 단골인 이인호씨(58)는 “미용실이 껄끄러워 이발소를 찾던 중 아내가 유서 깊은 곳이 있다며 추천해줬다”며 “괴정동에 살면서도 이곳만 찾았는데 이발소가 사라져도 개인적으로 찾아가 부탁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재개발이 본격화하면 이곳 대창이용원도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이 씨는 ‘아쉽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제야 쉴 수 있겠다”며 농담처럼 말했다. 이발소는 사라지겠지만 한 이발사의 인생과 이곳을 오가며 숱한 단골들이 나눴을 사연은 가슴 속에 저마다의 추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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