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고민 상담받아 돈벌이 나선 ‘나쁜 어른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8일 03시 00분


익명상담 앱 ‘나쁜 기억 지우개’ 논란


“저는 은따(은근한 왕따)여서 소외되며 투명인간, 호구 취급받아요.”

초등학생 A 양(12)은 지난해 9월 청소년 익명 고민 상담 애플리케이션(앱) ‘나쁜 기억 지우개’에 아무에게도 말 못 할 고민을 적어 올렸다. 이 앱은 ‘고민은 나눌 때 지워진다’며 고민을 익명으로 나누면서 치유하자는 취지라고 소개했다. A 양은 익명으로 “나는 성격이 내성적이고 유머가 없고 매력도 없어 정말 재미없는 애”라며 고민을 털어놨다. 2016년 만들어진 이 앱은 그동안 50만 번 넘게 다운로드됐을 만큼 청소년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A 양을 비롯한 수많은 청소년들은 익명성을 믿고 털어놓은 고민이 어른의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됐다는 건 꿈에도 몰랐다. 앱을 만든 ‘나쁜 기억 지우개 주식회사’는 지난해 10월부터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이 운영하는 데이터 오픈마켓인 데이터스토어에 청소년들의 고민을 엑셀 파일 형태로 만들어 월 이용료 500만 원에 내놨다. 파일에는 9∼24세 앱 이용자들의 고민 내용과 글쓴이의 출생연도, 성별, 글을 쓸 당시의 위치정보(위도, 경도)까지 담겼다. 이 업체는 앱을 개발한 이모 씨가 운영하는 개인 스타트업이다.

업체가 데이터스토어에 올린 판매 글에는 청소년들의 출생연도와 성별, 위치정보가 기재된 고민들이 샘플 형태로 올라와 있었다. 샘플에는 ‘부모님과의 관계가 너무 힘들다’ ‘중3 여자인데 학업성취도 평가에서 영어를 40점 받았다’ ‘하교하는데 짝사랑하는 남자를 우연히 만났다’ ‘누군가 내게 큰소리로 말하면 온몸에 경련이 온다’ 등의 고민이 담겨 있었다. 데이터스토어는 업체가 데이터 판매를 신청하면 데이터산업진흥원이 검열해 장터에 게시하는 방식이다. 개인정보보호법에 저촉되는 데이터는 판매 대상에서 배제한다고 진흥원은 설명했다. 진흥원 관계자는 “나쁜 기억 지우개가 판매 신청한 자료에는 실명, 주소 등 민감한 개인정보가 일절 없었다”며 “글을 썼을 당시 위치정보만으로는 개인정보가 아니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고민 내용과 위치 정보를 조합하면 본인이나 가까운 지인은 글쓴이를 특정할 수도 있어 보였다.

앱을 사용했던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고민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았다는 걸 알게 되자 ‘나쁜 기억을 지워준다더니 평생 못 지울 나쁜 기억을 만들어줬다’며 반발했다. 이 앱은 ‘작성한 글은 24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지워지며 당신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홍보해 왔다. 하지만 정작 업체 데이터베이스(DB)에는 구체적 위치정보와 함께 글 내용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논란이 불거지자 업체 측은 5일 데이터 판매 글을 삭제하고 유튜브에 해명 영상을 올려 사과했다. 업체 측은 “무료로 운영되는 앱이고 수익이 크지 않아 운영비를 충당하려고 실명 등 민감한 개인정보를 지운 데이터 판매 글을 올렸다”며 “데이터가 한 건도 팔리지 않았기에 고민 내용이 유출되진 않았다”고 해명했다. 업체는 자살 등의 우려가 높은 청소년을 지역 청소년상담센터와 자동 연계시켜 주기 위해 위치정보를 수집했지만 6일부터는 중단했다고 밝혔다.

조동주 기자 djc@donga.com
#익명상담 앱#논란#나쁜기억 지우개#청소년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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