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자 밖에 모르는 피자쟁이가 ‘대한민국 대표’ 피자를 만들겠다는 커다란 꿈을 갖고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피자를 만들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피자쟁이’의 꿈은 결국 ‘죄송합니다’란 말과 함께 좌절됐다. 8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의 한 골목에는 피자 가게 주인이 남긴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안내문은 색이 누렇게 바랬고 안내문이 덩그러니 나붙은 유리문은 먼지로 얼룩져있었다. 2017년 8월 문을 닫은 이 피자 가게는 1년 반이 다 되도록 새 주인을 맞지 못하고 있었다.
이 가게가 있는 이태원은 지난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인스타그램에서 위치 태그가 가장 많이 된 국내 최고의 ‘핫스팟(Hot spot)’이었다. 하지만 빛 좋은 개살구였다. 이달 초 둘러본 이태원 일대 지역 상인들은 어느 때보다 추운 겨울을 나고 있었다.
● 텅 빈 가게들…곳곳에 대부업체 전단만
8일 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 주변의 이태원로. 폐업한 상가는 전염병처럼 번져있었다. 불과 1, 2년 전만 해도 손님들이 줄을 서 기다려야 했던 가게들 대부분이 ‘임대’ 안내문을 내붙인 채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형 의류매장 등이 성업하던 곳이었지만 상가 유리창엔 부동산 중개업소에서 내건 임대 현수막이나 파티, 공연을 안내하는 포스터들만 빼곡히 붙어있었다.
SNS 등에서의 입소문을 타고 전주 ‘객리단길’, 경주 ‘황리단길’ 등 전국의 ‘~리단길’ 열풍을 이끈 이태원동 경리단길은 상황이 더 좋지 않았다. 경리단길을 따라 10여 분을 걸어 올라가는 동안 언뜻 보기에도 10곳이 넘는 상점이 비어있었다. 빈 상점들은 간판을 떼어낸 흔적이 흉터처럼 남아있었다. 빈 가게 현관문 앞에는 ‘목돈 쓰고, 푼돈 갚으세요’, ‘고객만족 No.1 사업자 전문대출’ 같은 문구가 담긴 대출 광고 전단만 널려있었다.
주말에는 몇몇 식당과 상점에 사람들이 몰리기도 하지만 평일에는 대부분 썰렁하다. 일부 가게들은 아예 평일 영업을 중단할 정도다. 이태원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이모 씨(29)는 “임대료는 내야하는데 평일 장사가 안 되다 보니 어떤 업주들은 다른 곳에 가서 아르바이트를 해 이곳의 임대료를 충당한다”고 말했다.
● “이미 떠난 상인과, 떠나려는 상인들뿐”
인근 부동산 중개업소와 상인들은 “이태원엔 이미 떠난 상인과, 떠나려는 상인들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가게를 빼는 것마저 쉽지 않다. 수천만 원의 권리금을 내고 들어온 임차인이 폐업을 하려고 해도 권리금을 내고 새로 들어오겠다는 사람이 없다. 빈 가게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업주들이 이른바 ‘공실(空室·영업을 하지 않는 가게) 상태’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다가 끝내는 권리금을 포기하고 나가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한다.
경리단길에서 간식을 파는 김모 씨(27)는 2017년 1월 이곳에서 가게를 열었다. 당시 권리금 3000만 원을 내고 보증금 1300만 원에 월세 130만 원의 조건으로 가게 임차 계약을 했다. 장사 초기엔 평일 저녁과 주말에 손님이 붐볐다. 하지만 지금은 평일은 말할 것도 없고 주말에도 찾는 손님이 많지 않다.
SNS 등을 통해 경리단길이 속칭 ‘뜨는 동네’로 인기를 끌면서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방문객 증가가 임대료 상승으로 이어지면서 문을 닫는 상가들이 속출해 상권이 예전의 매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됐다. 그런데도 한 번 오른 임대료는 내려가지 않았다. 김 씨는 “5년 전만해도 30만 원이던 월 임대료가 내가 들어오던 2017년 130만 원으로 올랐고 1년 뒤 200만 원 이상으로 뛰었다”고 말했다. 김 씨는 폐업을 하고 싶지만 권리금을 반으로 낮춰도 들어오겠다는 사람이 없다. 김 씨는 “권리금만 제대로 챙길 수 있다면 지금 남은 상인들은 전부 나간다고 할 것”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중대형(3층 이상 또는 연면적 330㎡ 초과) 상가 공실률은 이태원이 21.6%로 명동(6.4%), 종로(5.3%), 강남대로(2.6%)보다 높았다.
● ‘SNS 유명세’가 먹구름 몰고 와
이태원 상인들은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SNS에서의 유명세가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고 했다. 온라인에서의 인기가 수익으로 직접 이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찾는 사람들은 많지만 주말 특정 시간대에 몰리고, 작은 가게들이 많아 손님 수용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상점 주인 B 씨는 “정작 사람들이 몰려도 눈으로 보고 사진만 찍고 다른 데로 가버린다. 그런데 건물주들은 이런 걸 투자가치로 판단해 사람이 몰리니 무조건 임대료를 올리려고 한다”며 답답해했다.
이태원의 사례는 ‘SNS 입소문’이 만드는 전형적인 상업형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은 특정 지역에 자본이 몰리면서 임대료가 상승하고 이 때문에 원주민이 다른 곳으로 내몰리는 현상을 뜻한다. 임대료가 비싸지 않을 때 생긴 개성 있는 식당이나 상점들은 이태원 특유의 자유롭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유명세를 타고 유동인구가 늘면서 대형 프랜차이즈 업체들이 눈독을 들이기 시작하면서 땅값과 임대료는 급등했고 먼저 자리를 잡고 장사를 하던 영세업자들은 이를 감당할 수 없어 떠나게 되는 것이다.
이태원 상권이 주목받을 무렵 투기 목적의 기획부동산이 활개를 친 것도 임대료 급등의 한 원인이다. 투기 자본가들은 주택 등을 사들여 상업시설로 용도를 변경한 뒤 가게를 냈다. 그리고 인기가 절정일 무렵에 가게를 팔고 이태원을 빠져나갔다는 게 부동산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대박의 꿈을 안고 새 주인들이 들어왔을 땐 이미 인기가 한풀 꺾이고 임대료만 잔뜩 높아진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최근 2년간 최저임금이 가파르게 오르면서 이 지역 상인들의 부담은 가중됐다. 이태원의 한 카페는 2016년 4명이던 종업원을 올해 1명도 쓰지 않는다. 여기에 미군기지까지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이태원은 ‘다중고(多衆苦)’를 겪고 있다.
김자현기자 zion37@donga.com
이윤태기자 oldsport@donga.com
최수연기자 newsy@donga.com
▼ 젠트리피케이션 대응 사례 ▼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의 인기가 불러온 위기에 맞서 이태원 상인과 건물주들은 함께 이태원 살리기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경리단길살리기추진위원회’ 등 지역 상인들을 중심으로 ‘이태원 재활’을 위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건물주들 중에는 위기를 인식하고 한달에 450만원까지 받던 임대료를 200만 원까지 낮춰주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늪에 빠진 상권은 아직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해외에서는 젠트리피케이션에 따른 문제 해결을 위해 민관이 머리를 맞댄 사례가 있다. 서울연구원이 2017년 내놓은 보고서 ‘해외 젠트리피케이션 대응 사례와 시사점’에 따르면 영국 런던시는 해크니구 쇼디치에서 활동하는 젊은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이 임대료 상승으로 이곳에서 밀려날 처지에 놓이자 대책을 마련했다. 정부 차원에서 예술가들을 위한 건물을 지어 분양했고 구의회는 젠트리피케이션 대응을 위한 컨설팅과 자금 조달 등을 지원했다. 해크니협동조합은 지방정부나 기업으로부터 건물을 임차 또는 기부 받은 뒤 이를 예술가들에게 다시 임대했다. 이를 통해 얻는 수익은 지역 문화사업 등에 재투자해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에 혜택이 돌아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었다.
국내에서는 서울 성동구의 사례를 주목할 만 하다. 성동구는 성수동을 지속가능발전구역으로 지정하고 건물주와 임차인의 상생협약을 주선했다. 그 결과 2017년 하반기 이 지역에서 임대차 계약을 갱신한 업체 64곳 중 50곳이 임대료를 상승 없이 재계약을 했다. 이들 업체의 임대료 평균 인상률은 상생협약 이전인 2016년 18.6%에서 2017년 하반기 4.5%로 크게 낮아졌다.
‘골목길 자본론’의 저자 모종린 연세대 국제대학원교수는 “삼청동의 전통문화, 이태원의 외국인 문화와 같이 지역 특색을 살리면서 소상공인의 역량을 키우는 체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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