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시 패스로 ‘역전의 기회’ 잡은 야구선수 출신 이종훈 판사 [양종구의 100세 시대 건강법]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19일 14시 00분


이종훈 판사가 서울 서초구 서초동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했다.
이종훈 판사가 서울 서초구 서초동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했다.
이종훈 서울중앙지법 판사(38)는 서울 성남고 2학년 10월까지 엘리트 야구선수였다. 하지만 야구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판단에 선수생활을 그만두고 공부를 시작했고 수학능력시험과 사법고시를 잘 치르고 유명 법무법인 변호사를 거쳐 현재 판사로 일하고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엘리트 선수의 길로 접어든 뒤 7년만의 일이었다. 전국체전을 다녀오자 아버지께서 ‘야구를 그만두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고민을 해봤는데 야구로는 더 이상 발전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좋아서 야구 선수를 시작했지만 엘리트선수로 프로까지는 못 갈 것 같았다. 그래서 과감히 포기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고교 2학년 공식 출전 기록이 대타 두 타석에 안타 하나와 볼넷 하나. 1년이란 시간이 더 있고 3학년에 올라가면 출전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겠지만 야구선수로서는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서울 강남초등학교 시절. 이종훈 판사 제공.
서울 강남초등학교 시절. 이종훈 판사 제공.

운동을 그만둘 때 성적이 2학년 전교 755명 중 750등. 반에선 51명 중 50등이었다.

“솔직히 공부로도 성공하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야구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능도 있어야 했다. 난 아무리 열심히 해도 어느 순간부터 실력이 늘지 않았다. 육상 단거리 100m를 보자. 훈련 하지 않고도 12초에 주파하는 사람이 있고 20초에 뛰는 사람이 있다. 20초에 뛰는 사람을 아무리 훈련시킨다고 10, 11초에 달릴 수 있게 하진 못한다. 포기하는 게 합리적이란 판단을 했다.”

갑자기 ‘운포자(운동 포기자)’가 됐다. 그리고 2학년 10월부터 첫 번째 시험을 준비했다.

“영어로 말하면 Daddy와 Sad 같은 기초적이 단어도 몰랐다. 대디가 아빠라는 것은 알았지만 스펠링은 몰랐다. 발음기호도 몰랐다. 헌책방에 가서 영어와 수학 중학교 1학년 교과서를 샀다. 기초가 없으니 수업을 이해할 수도, 따라갈 수도 없었다. 다른 과목 점수는 끌어 올렸는데 영어 수학은 아무리 해도 점수가 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시험범위 영어, 수학도 막무가내로 외웠다.”

그렇게 2학기 기말고사를 치렀다.

“반에서 27등을 했다. 당시 선생님이 ‘야, 야구부 커닝한 거 아냐’라고 할 정도로 결과가 좋았다. 적어도 공부에서는 노력의 대가가 성적으로 나왔다. 야구는 노력해도 안 됐는데…. 그 때부터 공부가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3학년 들어 본격적으로 수학능력시험에 대비한 공부에 들어갔다.

첫 수능 모의고사 시험을 봤는데 400점 만점에 230점. 1학기 중간고사에서 반에서 14등, 2학기 중간고사에서 11등까지 올랐지만 학교를 그만뒀다. 3학년 10월쯤이었다.
성남중학교 시절 선수 등록증. 이종훈 판사 제공.
성남중학교 시절 선수 등록증. 이종훈 판사 제공.

“1, 2학년 때 공부를 하지 않아 내신이 좋지 않았다. 성남중부터 성남고까지 5년을 다닌 학교를 떠난다는 게 너무 아쉬웠다. 하지만 공부로 새로운 인생을 살기위해선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검정고시를 본 뒤 수능을 봐야 했다.(이 판사는 나중에 성남고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이 판사는 1년을 더 공부한 끝에 인하대 법학과에 들어갔다.

“공부하는 법을 알게 됐고 더 하면 점수가 오를 것 같았다. 1년 더 공부하려고 했는데 부모님께서 ‘이 정도면 됐다’고 말렸다.”

법학. 어려웠다. 하지만 하면 할수록 매료가 됐다.

“법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사회에 이바지 할 수 있는 바가 많다는 점에서 법률가라는 직업에 매력을 느꼈다. 또한 법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직접 도와줄 수 있는 실용적인 학문이라는 점이 나를 더욱 매료시켰다. 내가 열심히 하면 한 만큼 의뢰인의 이익을 더욱더 잘 대변할 수 있고 내가 실력이 없다면 의뢰인이 법적 이익을 지켜주지 못하는 점에서 충분히 동기부여도 됐다. 이것이 사법고시를 준비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됐다. 법은 야구 이상으로 내 가슴을 뛰게 했다. 사범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한 이래로 법률가가 내 천직이라는 점을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재미가 있었고 적성에도 맞았다.”

2004년 공익근무요원으로 군대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사법고시에 도전했다.

“2006년 사시 1차에서 10등으로 합격한 게 자만에 빠진 계기가 됐다. 사실 1차에 집중하느라 2차 시험 준비를 하나도 못했다. 그래서 첫 2차 시험은 사실상 경험을 쌓기 위해 봤다. 그런데 2007년 2차 시험까지 망치고 1년 넘게 방황을 하게 됐다.”

1차를 잘 봐서 자만한 이유도 있었지만 지나치게 자신을 몰아가다 한 순간 무너져 내린 측면도 있었다.

“2차 시험을 준비하면서 나 자신에 대한 기준을 너무 엄격하게 정했다. ‘단 하루도 쉬면 안 된다’ ‘예정된 공부에서 조금만 밀려도 끝이다’ 지나치게 철저하게 하려다보니 그게 스트레스가 됐고 어느 순간 긴장의 끈이 풀리면서 완전히 무너졌다. ‘그 순간 이제 끝났다’는 느낌이 왔다. 사시를 포기하기로 했다. 야구를 포기하던 날이 생각났다. 야구를 좋아했지만 불투명한 미래를 바라보며 운동하는 것이 무의미했다. 그래서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런데 부모님께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한번만 더 준비해보라’고 해서 다시 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하루, 1주일, 10일 공부 못한다고 죽을 것도 아니었는데….”
사법연수원 동기들과 구성한 ‘JUSTI42’ 팀으로 활약하던 모습. 이종훈 판사 제공.
사법연수원 동기들과 구성한 ‘JUSTI42’ 팀으로 활약하던 모습. 이종훈 판사 제공.

이 판사는 실패를 통해서 많이 배웠다.

“사실 야구를 일찍 포기하면서 인생을 배운 것 같다. 실패하고 다시 도전하고…. 포기하지 않으면 결과가 좋다는 것을 체득했다. 7년 동안 꾼 꿈을 포기함으로써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청소년기를 허비했다고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7년간 야구 선수로 살아온 삶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남들보다 일찍 경험한 실패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게 했고, 무엇으로도 얻을 수 없는 내 삶의 자양분이 됐다.”

이 판사는 다시 사시에 도전해 2009년 1,2,3차까지 완벽하게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에서도 준수한 성적을 냈고 국내 최고 법무법인인 김&장에서 변호사로 활약했다. 2017년 말 판사 임용에 합격해 판사의 길을 걷고 있다.

“야구로 치면 변호사는 그라운드를 누비는 선수다. 판사는 경기를 조율하고 최종 판결을 내리는 심판이다. 변호사도 판사도 내 적성엔 딱 맞는다.”

이 판사는 뒤늦게 공부를 시작하며 철저하고 효율적인 방법을 찾았던 게 법조인의 삶을 사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수능과 사시를 준비하며 시중에 나온 합격기는 다 사서 봤다. 그들이 한 효율적인 공부 방법을 따라 하면서 내게 맞는 법을 찾았다. 어차피 열심히 하는 것은 당연하다. 같은 시간에 얼마나 효율적으로 공부하느냐가 중요했다. 나만의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연구했고 결국 찾았다.”

이 판사는 2012년 ‘인생은 야구처럼, 공부는 프로처럼’이란 책을 출간했다. 야구를 그만두고 공부를 시작해 법조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렸다. 중간 중간 공부를 효율적으로 하는 방법도 제시했다. 이 판사가 가장 강조하는 공부 방법은 ‘이해’와 ‘복습.’

“아무리 머리 좋은 사람도 한 번보고 모두 이해하고 기억할 수는 없다. 보고 또 봐야 이해도 되고 잊어버리지도 않는다. 난 수업을 듣고 4번을 복습했다. 수업 듣고 바로, 자기 전, 다음 날 수업 전, 그리고 주말에 다시 한번….”
사법연수원 동기들과 구성한 ‘JUSTI42’ 팀으로 활약하던 모습. 이종훈 판사 제공.
사법연수원 동기들과 구성한 ‘JUSTI42’ 팀으로 활약하던 모습. 이종훈 판사 제공.

이 판사는 ‘야구하지 않고 공부를 했더라면 더 잘했을 것’이라는 주의의 평가를 들을 때면 다소 불편하다.

“어떤 사람들은 야구를 하다 공부를 했는데 이 정도면 야구를 안했다면 분명 더 공부를 잘했을 거라는 듣기에 참 낯간지러운 칭찬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생각해보면 야구를 했기 때문에 지금의 나가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는 참 끈기 없고 참을성 없는 그런 아이였다. 야구를 하면서 끈기와 오기, 근성, 열정을 몸에 익히게 됐다. 사실 근성만 있다면 못해낼 일은 없다. 쉽게 좌절하고 포기해 버는 게 문제다.”

이 판사는 ‘야구하면서 공부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질문엔 “글쎄요”라며 웃었다. 하지만 운동선수들이 공부를 해야 하는 당위성은 강조했다.

“고교 1학년 때 한 선생님께서 내게 ‘넌 1시간 동안 네 이름을 한자로 써’라고 한 적이 있다. 운동선수는 자기 이름도 한자로 못쓴다며. 이는 운동선수는 공부를 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사실 운동선수가 공부를 못한 것은 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부를 시켰다면 잘 했을 것이다. 선수들에게 공부의 당위성만을 강조하지 말고 동기부여를 하고 칭찬을 하며 스스로 공부를 하게 만들어야 한다. 결국 엘리트 선수 중 10% 정도만 성공하고 나머지 90%는 딴 일을 해야 한다.”

이 판사는 공부는 노력하면 결과가 나온다고 강조한다.

“야구를 그만두고 공부를 할 때 나처럼 뒷자리에 있던 친구 중에는 ‘공부는 내 적성에 맞지 않는다’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틀린 말이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고 공부를 잘 해야지 성공하는 것도 아니지만 ‘공부가 내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 중에서 자신의 적성에 맞는 다른 것을 찾아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다. 지금 자신의 위치에서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어떤 것을 하더라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이 판사는 사법고시의 덕을 많이 봤다고 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사시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한 시험이었다.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사법연수원에서 공부하면서 가장 좋았던 점도 ‘공정성’과 ‘역전의 기회’였다. 고졸이든 전문대졸이든 대학졸업이든 오로지 법학 실력 하나로 승부를 본다. 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소위 말하는 ‘스펙’의 영향력이 미미하다. 사시가 가지고 있던 폐해도 없지 않았겠지만 10대와 20대 초반 공부라는 것을 하지 못했거나 열심히 하지 않고 있다 뒤늦게 공부하고 싶은 사람, 가난한 사람이든 열등생이든 그 누구든 불문하고 최소한 다시 한번 날아오를 기회를 주는 장이 사라진 것은 안타깝다.”
사법연수원 동기들과 구성한 ‘JUSTI42’ 팀으로 활약하던 모습. 이종훈 판사 제공.
사법연수원 동기들과 구성한 ‘JUSTI42’ 팀으로 활약하던 모습. 이종훈 판사 제공.

이 판사는 2년 전까지는 자주 야구를 즐겼다. 사법연수원 42기 동기생들과 ‘JUSTI42(JUSTICE+42)’를 만들어 법조리그에 참여했다. 하지만 법조리그가 없어지고 판사로서의 새로운 삶에 적응하느라 즐길 기회가 줄었다. 조만간 다른 사회인 리그에 참여해 야구를 다시 시작할 계획이다. 만 40이면 ‘선출(선수출신)’에서 해방되니 맘껏 그라운드를 누빌 수 있단다.

이 판사는 인터뷰 내내 “난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운도 노력하는 사람에게 오는 법이다. 야구선수 출신 이 판사는 엄청난 노력으로 사실상 ‘무’에서 ‘유’를 창조한 개척자다.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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