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법상 ‘생산 10년內’ 사용 제한… 공중서 환자 올릴수있는 대형기종
한정된 예산으로 새제품 구입 어려워, “군용은 20년 넘어… 지나친 규제”
항로변경 까다로워 우회비행 불편도
지난해 4월 충남 서산시에서 오토바이를 타던 한 시민이 사고로 중태에 빠졌다. 뇌출혈이 의심돼 천안시 단국대병원에 대기 중인 응급환자 전용 헬기(닥터헬기)에 출동 요청이 전달됐다. 하지만 사고 장소에서 가장 가까운 운동장 내 헬기장은 마라톤대회 준비로 이용할 수 없었다. 이 헬기는 환자를 공중에서 끌어올릴 수 있는 호이스트(권상기)가 장착돼 있지 않은 소형 기종이라 반드시 헬기장에서만 환자를 태울 수 있다.
결국 닥터헬기는 사고 장소에서 28km나 떨어진 다른 헬기장에 내렸다. 환자 역시 119구급차에 실려 그 헬기장까지 이동해야 했다. 환자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치료 골든타임’을 놓친 탓에 지금도 후유증 치료를 받고 있다.
이 사건은 정부가 연간 200억 원을 들여 운영하는 닥터헬기의 존재 이유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닥터헬기가 간절한 응급환자는 차가 꽉 막힌 고속도로 한가운데나 바다 위 선박 등 헬기가 착륙할 수 없는 곳에서도 발생한다. 하지만 현재 가천대 길병원 등 전국 병원 6곳에서 운영하는 닥터헬기는 모두 중소형으로 호이스트 구조가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닥터헬기가 출동했다가 적당한 착륙장을 찾지 못해 되돌아오거나 아예 출동조차 하지 못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자유한국당 김승희 의원이 국립중앙의료원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닥터헬기가 도입된 2011년 9월 이후 지난해 6월까지 ‘착륙장 사용 불가’로 환자를 헬기에 태우지 못한 사례는 143건에 이른다.
‘닥터헬기 무용론’의 뿌리엔 불합리한 규제가 자리 잡고 있다. 현행 응급의료법상 닥터헬기의 기령(機齡)은 ‘생산 10년 이내’로 제한돼 있다. 한정된 예산(대당 연간 30억∼40억 원)으로 10년 이내 최신 기종을 구입하려면 호이스트를 장착할 수 있는 대형 헬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정비를 잘한 중고 헬기는 새것과 큰 차이가 없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엔진 등 주요 부품을 모두 교체해 안전성 면에서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쌍용 구미대 헬기정비과 교수는 “국군의 주력 헬기도 20년이 넘은 것들인데 닥터헬기 기령을 10년으로 제한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도 ‘10년 제한’의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복지부 관계자는 “새 제품일수록 안전하다고 보고 이런 조항을 둔 것 같은데, 구체적 근거는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닥터헬기를 ‘긴급항공기’로 분류한 항공안전법도 문제로 지적된다. 긴급항공기는 소방헬기 같은 ‘국가기관 항공기’와 달리 출동 후 경로를 바꾸려면 반드시 지상에서 근무하는 운항관리사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상황이 시시각각 변하는 응급의료 특성을 반영하지 않은 ‘탁상 규제’의 전형이다.
이국종 아주대병원 권역외상센터장은 5월 국내 일곱 번째 닥터헬기 도입을 앞두고 이런 규제를 풀어달라고 정부에 요청했다. 호이스트를 장착할 수 있는 중고 대형 헬기를 구입해 환자를 어디서든 구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복지부는 닥터헬기의 기령 제한을 완화하려면 정책 연구가 선행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국토교통부는 닥터헬기를 ‘국가기관 항공기’로 재분류하면 중앙정부의 안전 감독에서 제외돼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며 공식 거부했다. 하지만 이는 소방헬기 등이 이미 지방자치단체의 감독을 받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승희 의원은 이런 불합리한 규제를 바로잡기 위해 항공안전법 개정안을 곧 발의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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