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탐나 배상하는 것 아냐”…김복동 할머니, 생전의 외침들

  • 뉴시스
  • 입력 2019년 1월 29일 12시 01분


“돈이 탐나 배상하라는 것이 아니다. 할머니들이 죽도록 기다리지 말고 정부가 해결해 추운 겨울에 눈보라를 맞지 않게 해 달라. 우리의 한을 제발 풀어 달라.” (2013년 10월14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 증인 출석)

지난 28일 오후 10시41분께 암으로 명운을 달리한 고(故) 김복동 할머니는 세계 곳곳에서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를 증언하고 일본 정부에 사과를 요구한 국내 ‘위안부’ 피해의 산 증인이었다.

1926년 경상남도 양산에서 태어난 김 할머니는 만 15세였던 1940년 일본으로 끌려가 중국,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 일본군의 침략경로를 따라 끌려다니며 성노예 피해를 당했다. 1947년 고향에 돌아온 김 할머니가 성노예 피해 사실을 공개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92년 3월이다.

같은해 8월 제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 증언을 시작으로 국내 뿐 아니라 미국과 일본, 유럽 등 세계 각지에서 우리나라의 위안부 피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직접 목소리를 냈다.

특유의 강인한 성정으로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2015년 7월2일에는 미국 워싱턴 DC의 일본대사관 앞에서 직접 수요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김 할머니는 이 자리에서 “한국에서 온 피해자, 나이 90세, 이름은 김복동이다”라며 “일본 정부가 말을 안 들어서 미국까지 왔다”고 일본 정부를 방조하는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을 향해 일침을 날렸다. 구순의 나이였지만 눈은 빛났고 음성은 카랑카랑했다.

“일본은 전쟁범죄 국가, (헌법에) 전쟁을 못 치르게 돼 있다. 근데 아베 신조(安倍晉三) 일본 총리가 미국 와서 오바마 대통령한테 우리들도 전쟁 치르게 해 달라, 그러니 오바마도 이 큰 일국의 대통령이 아무리 소국이라 해도 우리 정부에 의논도 한마디 없이 그래 좋다 해라, 이게 말이 되냐?” (워싱턴 DC 수요시위에서)

같은해 12월 일본과의 위안부 합의 타결 이후에는 더욱 비판의 수위를 높여갔다. 당시 한일 위안부 합의를 바탕으로 일본 정부가 10억엔을 출연해 화해치유재단이 설립됐다.

“할머니들한테 이렇다 할 한마디 상의도 없이 자기네들끼리 타결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우리들이 거지도 아니고 생활비 대주고 하니까 먹고 사는 건 충분하다. 돈이 탐나서 싸우는 건 절대 아니다. 거지 동냥 주는 것도 아니고, 애들 사탕값 주는 것도 아니고, 배상도 아니고, 이런 사죄는 받을 수 없다.” (한일합의 타결 후 영상 메시지를 통해)

김 할머니는 암 투병 중에도 직접 화해치유재단 해산 시위에 나섰다. 지난해 9월3일 김 할머니는 서울 종로구 외교통상부 청사 앞에서 하얀 우비를 입고 휠체어에 탄 채 빗속에서 꿋꿋이 1인 시위를 벌였다.

“(암으로) 수술 받은 지 5일 밖에 안됐는데 방에 드러누워 있어도 속이 상해 죽겠더라. 아무 말이라도 한마디 해야겠다 싶어서 나왔다. 우리가 위로금 받으려 이때까지 싸웠나. 위로금 1000억원을 줘도 우리는 받을 수 없다. 정부는 (화해치유재단)을 해산시켜 준다고 하면서도 해산시키지 않고 있다. 그것 하나 지키지 못하는 대통령을 어떻게 믿겠나.”(외교부 앞 빗속 1인시위에서)

김 할머니는 지난해 11월21일 화해치유재단 해산 소식을 접한 뒤 “지금이라도 이 할매의 소원을 들어 해산한다고 하니 다행이다”면서도 “그런데 ‘와르르 와르르’ 화해·치유재단이 무너져야 안심하지 내일, 모레 계속 미룰까봐 걱정이다. 이제 남은 것은 일본 정부가 사죄하고 배상하는 것 뿐”이라고 강조했다.

김 할머니는 위안부 문제 뿐 아니라 전쟁 성폭력으로 피해를 입은 여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여성인권 운동가이자 평화 운동가로서도 다양한 목소리를 냈다. 같은 피해자인 길원옥 할머니와 함께 2012년 3월8일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나비기금’을 발족하기도 했다.

“나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지만, 그래서 지금도 매주 수요일이면 일본대사관 앞에 서서 우리에게 명예와 인권을 회복시키라고 싸우기를 계속하고 있지만, 지금 세계 각지에서 우리처럼 전시 성폭력 피해를 입고 있는 여성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 여성들을 돕고 싶다.” (나비기금 설립 기자회견에서)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에 의해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들에게 한국 국민으로서 사죄를 드린다. 커가는 후손들과 어린이들은 절대로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되니, 각국에서 전쟁이 없는 나라가 되도록 힘을 써주면 좋겠다.” (2014년 3월8일, 베트남전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향해)

이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2015년 5월 국경없는기자회와 프랑스 AFP 통신으로부터 ‘자유를 위해 싸우는 세계 100인의 영웅’에 선정됐다.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는 2015 대한민국 인권상 국민훈장도 받았다.

김 할머니는 그러나 결국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받지 못한 채 아쉬운 눈을 감게 됐다.

빈소는 서울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특1호에 마련됐다. 발인은 2월1일 금요일이다. 지난 평생을 서슬퍼런 눈으로 지켜봤던 일본대사관 앞에서 노제를 치른 뒤 충남 국립 망향의 동산에 안치된다.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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