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7월 서울 강남구의 한 호텔. 맞선을 보러 나온 여자는 기가 막혔다. 난데없이 양장 차림의 장년 여성이 등장했다. 바로 남자의 엄마. 아들이 아파 대신 나왔다지만 ‘매의 눈’으로 자신을 뜯어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뭐 이런 인간이 있어.” 씩씩대며 집으로 돌아왔다.
같은 시간 남자는 몸살로 끙끙 앓았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인데다 주선자와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어머니를 보냈는데 “선 자리에 선글라스를 끼고 왔다”며 어머니 반응도 시큰둥했다. ‘틀렸다’ 싶어 더 아팠다.
●시어머니와 맞선 본 며느리
뒤늦게 소식을 들은 주선자가 여자에게 “괜찮은 신랑감이니 꼭 만나라”고 부탁했다. 두 번째 자리에 남자는 또 늦었다. 그런데도 여자는 남자가 밉지 않았다. 남자도 여자에게 끌렸다. 이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데이트를 즐긴 둘은 1992년 4월 결혼했다. 첫 여성 검사장 조희진 전 서울동부지검장(57·사시 29회·법무법인 담박 변호사)과 송수근 전 문화체육관광부 1차관(58·행시 31회·용인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다. 지난해 9월 각각 변호사와 교수로 변신한 부부를 지난달 24일 서울 중구 서울클럽에서 만났다.
―첫 만남이 드라마네요.
“주선자가 당시 상사셨던 이태창 전 법무연수원장 사모님이었어요. 그 분 잘못도 아닌데 계속 미안하다고 하셔서 다시 나갔죠. 억울해서 비싼 밥이라도 얻어먹으려고요.”(조)
“진짜 첫 만남 때 고기 집에 갔어요. 얇은 지갑에 1인분만 주문하려다 주인 타박에 2인분을 시켰죠. 투덜댔더니 아내가 ‘2차로 술을 사겠다’고 해요. 며칠 후 제가 ‘술을 얻어먹었으니 다시 밥을 사겠다’고 했죠. 요즘 말로 진상인가요?”(송)
―왜 끌렸나요.
“그 때 남편이 수원 소재 경기도청 송무계장이었요. ‘폼 나는 자리’가 아닌데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며 열심히 일하더라고요. 다른 남자도 두어 번 만났는데 남편이 순수하고 덜 계산적이었어요.”(조)
“별로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닌데 밝게 웃으며 잘 들어주더군요. 시원시원하고 거침없는 성격도 좋았죠.”(송)
애주가 송 전 차관은 연애기간 술을 끊고 한 여자에게 ‘올인’했다. 당시 조 전 지검장의 근무지 서울과 본인의 근무지 수원을 매일 총알택시로 오갔다.
●외조의 왕
조 전 지검장은 온갖 ‘최초’ 타이틀을 독식했다. 1990년 서울지검의 유일한 여검사로 공직에 입문해 첫 여성 법무부 과장·부장검사·검찰 교수·지청장·검사장 등 ‘여성 1호’를 꿰찼다. 지난해 6월 서울 동부지검장을 끝으로 28년의 검찰 생활을 마쳤다.
남편의 외조는 큰 힘이 됐다. 송 전 차관은 신혼집을 일부러 부인 근무지 근처에 마련했다. 출산 후 많이 아팠던 아내를 위해 육아에도 발 벗고 나섰다. 자신의 미 인디애나대 유학(1998~2000년), 미 뉴욕문화원장 재직(2007~2010년) 때도 사실상 홀로 외아들을 키웠다.
―외조에 눈 뜬 계기는요.
“출산 후 아내 몸무게가 30㎏대였어요. 보기만 해도 안쓰러웠죠.”(송)
“아들을 낳았을 때 남편이 장관 비서관이었어요. 매우 바쁠 때인데 저나 아이에게 짜증 한 번 안 냈죠. 휴일에 애를 안고 출근한 적도 있고요. 남편은 요리와 집안일을 다 잘해요. 냉장고 속 재료를 모아 만드는 ‘냉장고 파먹기’에 능하죠. 견과류 넣은 멸치볶음은 기가 막혀요. 이웃이 버린 화분을 가져와 꽃을 피운 적도 있고요.”(조)
“2009년 작고한 선친께서 아내를 아끼셨어요. 제가 법조인이 되길 바라셨는데 며느리가 대신 꿈을 이뤄드렸죠. 아내에게 늘 잘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송)
―결혼이 서로의 커리어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검찰 조직원의 절대다수가 남성이라 동료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남편 조언을 구했는데 제가 보는 관점과 많이 달랐어요. ‘이래서 이런 일이 벌어졌구나. 저 사람은 저래서 나에게 이렇게 행동하는 구나’를 알았죠. 법무부에 근무할 때는 술과 사람을 다 좋아하는 남편 덕에 제 인맥도 넓어졌고 업무 협조도 수월했어요. 처음 검사장 승진이 좌절됐을 때가 커리어 최대 고비였는데 남편 격려로 다시 일어났고요.”(조)
“둘 다 공직자지만 분야가 달라 서로 오래할 수 있었어요. 시시콜콜 다 아는 사이면 말도 많고 주변 눈치도 봐야하는데 그게 아니니 편했죠.”(송)
―‘잘난 배우자’와 살며 힘든 점은 없던가요.
“신혼 때 아내 동료들을 만났는데 자부심이 대단했어요. 면전에서 ”검찰이 월급도 많고 벼슬로도 더 높다. 조 검사가 ‘급’을 낮춰 시집갔으니 잘 모시라“고 하더군요. 기분이 나쁜데 화도 못 냈어요. 아내한테 피해가 갈 까봐. 술로 다 제압했죠.”(송)
“남편은 두주불사(斗酒不辭)에요. 술 마시고 새벽에 들어와서 많이 싸웠죠.”(조)
“문화부 동료들도 ‘센 마누라와 사는데 집에 놀러가도 되냐. 꽉 잡혀 살지 않냐’고 했어 요. 일부러 2차 때 다 집에 데려갔죠. 아내가 자주 라면을 끓였는데 당시 동료들이 아직 자랑해요. 검사가 끓여준 라면을 언제 먹어보겠냐며….”(송)
●최고의 교육은 ‘본보기’
둘은 슬하에 1남(25)을 뒀다. 미 스탠퍼드대 기계공학석사를 마치고 군 복무를 위해 귀국했다.
―자녀교육 비결은요.
“두 차례의 미국 생활 동안 아들과 24시간 붙어 있었어요. 야구, 농구, 배구, 권투 등 운동을 같이 하고 기타도 직접 가르쳤죠. 당시 피아노를 곧잘 쳤는데 귀국 후 멀리하기에 ”악기 하나는 다뤄야 인생이 풍요롭다. 혼자 하기 싫으면 같이 하자“며 아들을 꼬드겼죠. 그러다 제가 피아노에 더 빠졌어요. 2014년 ‘매력을 부르는 피아노’란 반주법 책도 냈죠.
요리도 마찬가지예요.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지 않고 시범을 보였죠. 아들이 ‘어릴 적 아버지 어깨 너머로 본 것이 지금의 자취 밑천’이라고 해요. 아들도 요리를 곧잘 합니다.”(송)
“혼자 살 때 퇴근 후 산책을 즐겼는데 어느 날 초등학생 2명이 아파트 주민 자전거를 훔치더라고요. 끝까지 따라가서 아이들을 잡고 그 부모도 만났죠. 제가 검사란 말은 안 했지만 ‘아이들을 이렇게 두면 안 된다’고 거듭 타일렀습니다. 결국 자전거를 주인에게 돌려줄 수 있었고요. 학교폭력과 비행청소년 문제에 적극 나섰는데 아들이 좋게 봐주더군요.”(조)
―다툰 적은 없나요.
“미 인디애나대 유학 시절 아내가 1년 늦게 미국으로 건너왔어요. 첫 마디가 ”애가 왜 이리 살쪘어. 그간 뭐한 거야“라는데 어찌나 서운하던지…. 전업주부가 남편한테 ‘집에서 놀면서 이것도 못 하냐’는 말을 들을 때 가장 서럽다던데 그 마음을 알겠더군요.”(송)
“당시 1년 간 같이 지내며 진짜 많이 싸웠어요. 그 전에는 각자 일로 바빠 사실상 ‘주말 부부’였는데 처음 24시간을 같이 보냈으니까요. 당시 남편은 제 말투를 문제 삼았는데 ‘매사 피의자 취조하듯 따진다’고 했어요.”(조)
“다툼이 있을 땐 둘 다 일단 말을 삼가요. 극단적 말이 큰 상처를 주잖아요. 말을 아끼니 앙금이 크지 않고 화해도 쉽더군요. 부부생활뿐 아니라 모든 일에 적용하려고 합니다.”(송) ●시련으로 돈독해진 부부애
부부는 최근 시련도 겪었다. 송 전 차관은 2017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조 전 지검장은 지난해 검찰 ‘성추행 사건 진상규명 및 피해회복 조사단’ 단장을 맡았다 일부 후배의 비판을 받았다.
검찰 일각에서는 ‘더 높은 곳도 가능했던 조 전 지검장이 조사단장 자리에 발목 잡혔다’고 보기도 한다. 이해당사자 모두를 만족시키기 어려운 사건의 성격 상 ‘독이 든 성배’였다는 뜻. 조 전 지검장은 담담했다. 또 두 사람은 입을 모아 “시련이 부부 사이를 더 단단하게 했다. 배우자의 소중함을 느꼈다”고 했다.
―왜 그렇죠.
“남편이 어려울 때 저는 별 문제가 없었어요. 제가 남편을 돌봐야하는데 정 반대였죠. 하루는 밤늦게 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더라고요. 뭐하나 봤더니 갈비 핏물을 빼요. 다음날 아침 꼭 저에게 먹여야 한다며…. 속이 말이 아닐 텐데 저를 위한 음식을 만들다니 마음이 짠했어요.”(조)
“아내와 상관없는 제 일로 아내 마음까지 불편하게 할 수 있나요. 저도 먹고 싶었고요(웃음).”(송)
“둘 다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때가 아닌 듯 합니다. 책이든 뭐든 나중에 밝힐 기회가 있을 거예요.”(조) ●지금이 신혼
―새 일은 어떤가요.
“검찰 시절에는 시간 제약이 많아 빨리 일을 마치는 게 중요했어요. 지금은 한 사건에 오래 집중할 수 있어 좋습니다. 언론 보도를 보고 일부러 저를 찾아오는 여성도 많고요. 자부심과 책임감을 동시에 느끼죠. 지인들이 ”떼 돈 버느냐“는데 큰 회사가 아니고 소액 사건도 많아요. 지난해 6월 퇴직 후 오래 쉬려 했는데 남편이 ‘얼른 일 하라’고 재촉했어요. 왜 그랬어? 빨리 돈 벌어오라고?”(조)
“제가 갑자기 강의를 맡았는데 저도 없는 집에 혼자 있으면 뭐해요. 교수처럼 정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변호사는 평생 할 수 있잖아요. 아내의 경험과 연륜을 썩히는 건 낭비죠.”(송)
―여가는 어떻게 보내시나요.
“산책, 탁구, 와인 마시기 등 모든 일상을 같이 해요. 진짜 신혼 때는 서로 바빠 주말 아니면 얘기 나누기도 어려웠는데 지금은 이게 신혼이구나 싶죠.”(송)
“남편 친구들 모임에도 자주 참석하는데 깜짝 놀랐어요. 둘이 있을 때 제가 이야기를 주도하는데 밖에서는 남편이 좌중을 휘어잡더라고요. 아들도 모르는 최신 유머도 구사하고…. 매일매일 남편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해 흥미진진합니다.”(조)
―결혼을 두려워하는 젊은 세대에 조언한다면.
“후배들에게 설사 이혼하더라도 결혼은 꼭 해 보라고 해요. 어떤 인생도 완벽하지 않아요. 가장 좋은 친구를 만날 기회를 포기하지 마세요. 일단 해 보고 아니면 다른 길을 찾으세요. 사회 일각에 결혼과 양육을 부정적으로 보는 분위기가 있어 안타깝습니다.”(조)
“육아가 쉽지는 않죠.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게 아니라 아이와 함께 커 나가는 겁니다. 제가 오십 넘어 피아노에 빠질 줄 누가 알았겠어요? 아들 때문에 시작한 피아노가 제 인생의 큰 기쁨이 됐어요. 아이를 통해 두 번째 삶을 산다고 생각하면 부담이 덜할 겁니다.”(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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