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국서 태어났다고… 우린 3등국민인가요”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2월 12일 03시 00분


‘탈북母-중국인父’ 자녀들의 눈물
中서 살다가 입국, 한국말 서툴러
탈북민과 달리 정부 지원 못받아 학교생활 적응 못하고 진학 포기


7일 경기도의 한 대안학교에서 만난 김인희(가명·18) 양은 본보 기자와 마주 앉은 자리에서 입을 굳게 다문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김 양은 어머니가 탈북민이어서 한국 국적을 얻었지만 한국말은 하지 못한다.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김 양은 지난해 4월 한국에 왔다. 한국어 수업 시간에는 엎드려 잠만 잔다. 수업이 끝난 뒤에는 중국 소설을 보며 시간을 보낸다. 연락도 중국에 있는 친구들과만 한다. 김 양은 아버지가 중국인이다. 2001년 북한을 탈출한 어머니가 중국에 머물 때 아버지와 결혼했다.

주모 양(18)은 2017년 서울의 한 아파트 9층에서 투신을 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하반신이 마비되는 중상을 입었다. 주 양은 “엄마는 돈을 벌어야 한다며 매일 밤늦게 집에 왔다. 엄마가 한국어를 빨리 배우라고 재촉해 순간 너무 화가 났다”고 말했다. 2015년 7월 한국에 온 주 양 역시 김 양과 같은 ‘제3국 출생 탈북민 자녀’다. 어머니가 탈북민이고 아버지는 중국인이다.

김 양과 주 양의 경우처럼 ‘제3국 출생 탈북민 자녀’ 대부분은 열 살이 지나 한국 땅을 밟는다. 어머니가 먼저 한국에 정착한 뒤에야 자녀를 데려오기 때문이다. 이미 청소년기에 이른 이들은 한국어를 배우는 데 애를 먹는다. 한국문화도 낯설다.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 정체성 혼란도 겪는다. 어머니가 한국에서 재혼하는 경우도 적지 않아 새아버지와 불화를 겪는 일도 있다. 북한에서 태어난 탈북민 자녀를 위한 정부 지원도 이들에겐 제공되지 않는다. 입국과 동시에 ‘3등 시민’이 되는 것이다.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 정체성 혼란”… 새아빠 집에선 ‘유령 아이’


본보 취재팀이 만난 ‘제3국 출생 탈북민 자녀’ 30여 명은 “한국에 적응하는 게 너무나 힘겹다”며 그간의 험난했던 경험들을 털어놨다. 이들은 15∼21세의 청소년 또는 성인이지만 상당수가 한국말을 못 해 인터뷰는 중국어 통역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국적만 한국인일 뿐 사실상 중국인으로 살고 있는 제3국 출생 탈북민 자녀는 최소 1720명이다. 정부가 지난해 12월 집계한 국내 초중고교와 대안학교 재학생 수다. 2011년 608명에서 7년 새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학교 교육을 받지 않거나 이미 졸업한 경우도 많아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 다 커서 한국 왔는데 가정에선 방치

17세 때 한국에 온 이진호(가명·20)씨는 2016년 입국 직후부터 모텔에서 생활했다. 탈북민인 어머니가 한국에서 재혼할 때 시댁에 아들의 존재를 숨겼기 때문이다. 이 씨는 모텔에 방치된 채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상당 기간 거의 혼자 지냈다. 이 씨는 분노조절 장애를 갖게 됐고 깨진 유리병으로 자해를 하는 등 이상행동을 했다. 이 씨는 지난해 1월 탈북민 대안학교에 입학했지만 과격한 행동을 보여 3개월 만에 퇴학당했다.

경기도의 한 대안학교에 다니는 채모 군(15)은 수업 도중 갑자기 일어나 교실을 돌아다니는 등 불안증세를 보인다. 채 군은 인신매매를 통해 어머니와 결혼한 중국인 아버지에게서 어릴 적부터 폭행을 당했다. 먼저 한국에 들어왔던 채 군 어머니는 2017년 아들을 돌봐줄 사람을 구할 수 없어 중국인 남편도 함께 입국시켰다. 채 군의 담임교사는 “한국에서도 아버지의 폭력이 이어지고 있다. 아이를 칭찬해주려고 어깨를 만질 때도 몸을 피한다”고 전했다.

채모 양(17)은 2017년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영유아인 동생 둘을 떠맡게 됐다. 먼저 한국에 온 어머니가 재혼을 해 두 아이를 낳았지만 새아버지가 가출해버린 것. 어머니마저 또 다른 남자와 동거를 하게 돼 육아는 채 양의 몫이 됐다. 채 양은 43m²(약 13평) 남짓한 임대주택에서 어린 두 동생을 돌보느라 6개월 넘게 집 밖을 나가지 못했다. 뒤늦게 학교에 입학했지만 한국말을 하지 못해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채 양은 “중국인 친구들과 하루 종일 모바일 메신저로 연락하며 외로움을 달랜다”고 말했다.

○ 대입 특례전형도 없어

일부 제3국 출생 탈북민 자녀들은 한국어를 익힌 뒤 대학에 가기 위해 노력하지만 걸림돌이 많다. 북한에서 태어난 탈북민의 경우 대입 특례전형이 마련돼 있지만 제3국 출생 탈북민 자녀를 위한 별도의 대입 전형은 없다. 한국 학생들과 똑같이 경쟁해야 하는 처지다. 지난해 대입 검정고시를 본 김모 씨(20·여)는 “19세 때까지 중국 역사를 공부하다가 지난해 처음 한국사 책을 보게 돼 모든 게 낯설었다. 국어는 중국에서 배운 조선어와 많이 달라 거의 새로 공부해야 했다”고 했다.

2015년 한국에 온 이모 씨(21)는 대학 입학을 위해 1년 반 만에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정보기술 자격증까지 땄다. 이 씨는 2017년 서울의 한 대학 ‘사회적 배려 대상자 전형’에 응시하려 했으나 이 씨의 검정고시 등급은 다른 한국 학생들에 비해 크게 낮았다. 암 투병 중인 아버지의 치료비 때문에 등록금을 내기도 어려웠다. 이 씨는 결국 대입을 포기하고 직업학교를 택했다.

탈북민은 ‘북한이탈주민 지원법’에 따라 정착금 지원과 정원 외 대학 특례입학, 등록금 면제 등의 혜택을 받지만 이 씨 같은 제3국 출신 탈북민 자녀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통일부는 이들을 위한 별도의 대입 전형을 마련하라고 각 대학에 권고했지만 이를 대학이 받아들인 사례는 없다.

○ “한국말도 못하는데” 입영통지 받고 불안


제3국 출생 탈북민 자녀 중 만 18세 이상 남성은 군 입대 대상이다. 이들 중 상당수가 입영 통지를 받은 뒤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2013년 입국한 이모 씨(20)는 지난달 대안학교 교사에게 ‘쌤, 저 죽고 싶어요. 어떻게 해야 이 마음이 없어지나요?’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이 씨는 “한국말도 잘 못하고 돌봐야 할 동생도 있는데 군대를 가야 한다니 걱정이 많이 됐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병무청 신체검사를 받은 최모 씨(20)는 “군대에서는 한국말로만 생활해야 하는데, 내가 모르는 단어가 많아 불안하다. 한국 군대는 엄격해서 내가 모르는 걸 쉽게 물어볼 수 없다고 하는데 (고참들에게) 많이 혼날까 봐 무섭다”고 토로했다. 지난해 한국에 온 방모 씨(20) 역시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한국의 군대 문화가 이해가 안 된다. 군대에서 왕따당하는 것 아닐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정체성 혼란도 문제다. 중국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뒤 지난해 2월 입국한 박모 씨(20)는 한국에 온 뒤에도 중국 친구들과만 교류한다. 박 씨는 “지난 1년간 한국 사람과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한국에 계속 살아야 해 국적은 유지하겠지만 내가 한국인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현행 병역법상 북한 출생 탈북민이거나 외국 국적자였다가 한국인으로 귀화한 경우 군복무가 면제된다. 중국 등 제3국에서 태어난 탈북민 자녀는 이 요건에 해당하지 않아 한국 국적을 취득하면 병역 의무를 지게 된다.

국내 다문화가정 출신 청년들도 군복무를 하지만 대부분 한국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원활하고 문화적 이질감도 작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도 강한 편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다문화가정 출신 병사들 가운데 그동안 문제가 됐던 사례는 없다”고 전했다.

천주교 광주대교구 북한이탈주민지원센터 소민윤 회장은 “제3국 출생 탈북민 자녀들이 지금 상태로 입대할 경우 관심병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 대체복무나 별도의 부대 편성 등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윤다빈 empty@donga.com·이소연 기자
#탈북민#제3국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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