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오후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물영아리오름 인근 목장. 제주지역 대표적인 포유동물인 야생 노루들이 파랗게 돋아나기 시작한 새싹을 뜯어먹으며 한가로운 한때를 보냈다. 이 목장 일대는 노루들이 자주 출몰하는 곳으로 주간에는 인근 숲 속에서 생활하다 인적이 뜸한 저녁 무렵에 나타나 먹이활동을 한다. 예년이면 30∼40마리 정도가 한꺼번에 떼 지어 나타나는 곳인데 노루 포획 때문인지 10여 마리밖에 관찰되지 않았다.
이날 제주도 세계유산본부는 제주노루 행동·생태·관리 보고서를 펴냈다. 개체수, 먹이식물, 행동 특성, 번식 생태, 서식지 이용 특징 등 노루 연구에 대한 종합적인 보고서로는 처음이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제주지역 노루 개체수는 2009년 1만2800마리에서 2013년 노루 포획이 승인된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해 2015년 8000마리, 2016년 6200마리, 2017년 5700마리, 2018년 3900마리로 줄었다.
이는 제주도 세계유산본부가 제시한 적정 노루 개체수인 6100마리에 크게 밑도는 수준이다. 제주지역 노루는 밀렵, 사냥 등으로 1980년대 멸종 위기에 놓였다가 지속적인 보호 정책으로 개체수가 증가했다. 1만4000여 마리까지 늘어나면서 농민들이 고충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피해 작물은 콩을 비롯해 당근 배추 메밀 무 더덕 등으로 다양했다. 농작물 피해 신청 면적은 매년 14km²에 이르렀다. 노루 접근을 차단하는 그물망은 별 효과를 보지 못했고 개소리, 총소리 등 다양한 음향은 민원을 유발했다.
제주도는 농민의 입장을 반영해 2013년 관련 조례를 개정해 노루를 ‘유해조수’로 지정하고 포획을 한시적으로 허용했다. 한 차례 연장을 거쳐 올해 6월 말까지 적용하고 있으며 지난해 말까지 노루 7032마리를 잡아 대부분 식용으로 소비했다. 밀렵 등을 감안하면 노루 1만 마리가량이 사라졌다는 분석이 있다. 연간 자연 증가는 1500여 마리로 추정되고 있으나 노루 개체수가 줄어들면서 자연 증가 역시 감소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들짐승으로 돌변한 유기견이 노루를 포식하고 있으며 2017년 도로에서 차에 치여 숨진 노루가 581마리에 이를 정도로 ‘로드 킬’이 여전한 것도 노루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다.
세계유산본부 관계자는 “적정 노루 수에 비해 크게 줄어들어 당분간 노루 포획을 중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며 “한라산국립공원과 주변 산림지역, 경작지대, 곶자왈, 오름, 관광지 등 세부적으로 구분해 노루를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제주도는 이번 보고서를 바탕으로 각계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해 노루 유해조수 지정 및 포획 허가 연장에 대해 논의할 계획이다.
노루에 의한 농작물 피해, 로드 킬 등에 대한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관리 및 분석하는 시스템 부재는 문제로 지적됐다. 관련 자료는 최근 10여 년 동안 농작물 피해 면적, 금액, 농가 수 등이 전부이고 이마저도 담당 직원이 바뀌면 사라질지 모르는 실정이다. 공식 신고된 포획 노루 7032마리에 대한 성별, 나이, 체중, 포획 장소 등에 대한 자료가 정리되지 않았고 도로에서 숨진 노루 역시 자료 축적 없이 그대로 매몰 처리됐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