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조용휘]해양수도의 민낯 드러낸 ‘러 화물선 충돌사고’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5일 03시 00분


조용휘·부산경남취재본부장
조용휘·부산경남취재본부장
‘시민이 행복한 동북아 해양수도 부산’은 대한민국 제2도시 부산의 슬로건이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발생한 러시아 화물선 시그랜드호의 광안대교 충돌사고는 시민이 불안한 ‘후진해양도시’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냈다.

사고를 낸 러시아인 선장 세르코프 안드레 씨(43)는 음주운항 등의 혐의로 법의 심판대에 서게 됐다. 그러나 부산의 자산인 부산항을 관리, 운영하는 부산해양수산청과 부산항만공사의 안일한 해양행정과 안전 불감증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관할 광역단체인 부산시의 책임은 또 어떠한가.

시그랜드호가 정박했다 사고를 낸 용호부두는 1990년 준공 이래 규모가 작고 대형 선박이 정박하기엔 시설이 열악해 부두 기능을 전환하거나 폐쇄해야 한다는 여론이 끊이지 않았다. 크루징 요트 3척과 부경대 실습선 2척을 비롯한 선박 계류시설로 건설됐지만 용호부두 내측이 매우 협소하다. 대형 화물선 접안에 필요한 선회장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용호부두는 2012년 제1차 항만재개발기본계획 수정 계획 고시와 2016년 제2차 항만재개발 기획계획에 기능 폐쇄가 반영됐다.

하지만 이후 아무런 조치도 이뤄지지 않았다. 현재는 일반잡화부두로 위험물이나 냉동어획물 등을 하역하도록 지정돼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시그랜드호는 광안대교에 충돌하기 전 옆 계류장에 정박해 있던 요트 2척과 바지선 1척을 잇따라 들이받았다. 우왕좌왕하던 전장 113m의 러시아 화물선은 좁은 부두에서 터닝서클(선박이 회전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곡선)을 간과한 채 선수를 돌리지 못하고 350m가량 떨어진 광안대교로 돌진했다. 용호부두와 광안대교 사이 최단거리가 235m에 불과한 점을 감안하면 그동안 대형 화물선 충돌사고가 없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일 정도다.

용호부두가 도선사 탑승을 의무화하는 강제도선구역이 아닌 점도 문제다. 선박에 탑승해 해당 선박을 안전한 수로로 안내하는 도선사는 안전한 부산 앞바다의 필수조건이다.

용호부두 바로 뒤쪽에는 단일로는 국내 최대인 약 1만 가구 규모의 아파트 단지가 있어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주민들은 짐을 싣고 내리는 화물선 작업과 이때 발생하는 소음 미세먼지 분진 등으로 인한 불편을 호소하고 있다. 2015년 국정감사에서는 용호부두를 통해 병기용 완성탄, 성형폭탄, 지뢰 같은 위험물 수천 t이 반입된 사실이 드러나 안전문제도 불거졌다.

정치인과 전문가들은 문제투성이인 용호부두에 대형 선박의 입항이라도 막아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기능 전환이나 폐쇄, 대체 부두 마련도 검토해야 한다. 해양수산부는 용호만 일원 관리권을 부산 남항 같이 부산시로 위임해 이 일대를 복합해양관광포트로 특화개발하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제안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해양강국, 해양수도의 길이 어떠해야 하는지 깊은 고민이 필요한 때다.

조용휘·부산경남취재본부장 silent@donga.com
#부산#시그랜드호#광안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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