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단지 내 도로가 법적 도로가 아니더라도 모든 운전자는 횡단보도의 보행자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1월 9일 대전지방법원 403호 법정. 심준보 부장판사가 차분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판결문을 읽어 나갔다. 2017년 10월 자신이 살던 아파트 단지 안 횡단보도를 건너던 김지영(가명·당시 5세) 양을 치어 숨지게 한 운전자 김모 씨(46)에 대한 항소심 재판이었다. 심 부장판사는 “피고인이 횡단보도에서 피해자를 치어 사망에 이르게 한 잘못이 무겁다”고도 했다. 하지만 김 씨에게는 금고 1년 4개월이 선고됐다. 일반적인 횡단보도 사망사고 운전자에 대한 형량보다 가벼웠다. 현행법상 김 씨에게 중과실 혐의를 적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1년 전 약속에도 달라진 건 없어
이 사고를 계기로 아파트 단지 내에서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보행자를 치어 숨지게 해도 가해 운전자를 엄하게 처벌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됐다. 아파트 단지 내 도로는 도로교통법이 정한 도로가 아닌 ‘도로 외 구역’이라는 것이다. 일반 도로였다면 교통사고처리특례법상 중과실이 적용돼 징역 2, 3년가량이 선고됐을 사건이다. 김 양의 부모는 지난해 1월 청와대 국민청원을 통해 이런 불합리한 법을 고쳐 달라고 했다. 이 청원에는 22만 명 넘게 동참했다. 지난해 3월 14일 청와대 디지털소통센터 김선 행정관이 진행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방송 ‘11시 50분 청와대입니다’에 출연한 이철성 당시 경찰청장은 “‘도로 외 구역’ 운전자에게 보행자 보호의무를 신설하고 위반 시 제재하는 것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2022년 교통사고 사망자 수를 2000명 선으로 줄이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와 맞물려 곧 법 개정이 있을 것으로 기대됐다.
하지만 1년이 다 돼 가도록 달라진 건 없다. 사유지 내 교통사고도 도로교통법상의 도로에 준해 처벌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을 담은 법안이 2년 4개월 전인 2016년 12월에 발의됐지만 아직 상임위원회 문턱도 넘지 못했다. 국토교통부, 행정안전부, 경찰청 등이 관련 법 개정을 위해 만든 협의체 논의는 겉돌고 있다. 경찰이 사유지(아파트 단지 안)에서의 도로교통법 위반 행위에 대해 어느 범위까지 개입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 양의 어머니 서모 씨(41)는 “국회에 묶여 있는 개정안이 반드시 통과돼 더 이상은 우리 가족처럼 슬퍼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호소하고 있다.
○ 1년 뒤엔 달라져 있을까 지난해 교통사고 사망자는 2017년의 4185명에서 9.7% 감소해 42년 만에 3000명대(3781명)로 떨어졌다. 윤창호 씨 사망사고를 계기로 사회 전반에 음주운전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진 것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2020년까지 교통사고 사망자 수를 3000명 아래로 떨어뜨리겠다는 국가 목표를 달성하려면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더 남아 있다.
상습적인 음주운전 근절을 위한 시동잠금장치 도입과 과속 운전자에 대한 처벌 강화 등이 대표적이다. 두 사안과 관련된 법안 역시 발의는 돼 있지만 1년 넘게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김영호, 자유한국당 송희경 의원이 2017년 발의한 ‘음주운전 시동잠금장치’ 도입을 위한 도로교통법 개정안에는 미국, 프랑스, 호주처럼 상습 음주운전자의 차량에 시동잠금장치를 장착하는 내용이 담겼다. 시동 전 음주 여부를 측정해 음주가 확인되면 시동이 걸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 국내외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됐는데도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는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며 법안을 계류시켰다.
‘보험 처리 만능주의’를 부추긴다는 지적이 제기돼 온 교통사고처리특례법(교특법)은 주승용 바른미래당 의원이 빨라야 올 상반기에 교특법 폐지 후 대체 입법안을 내놓을 예정이어서 20대 국회 내 처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20대 국회 임기가 내년 5월 29일까지라는 것을 감안하면 법안 발의 후 국회에서 논의할 수 있는 시간은 1년뿐이다. 1982년 제정된 교특법은 종합보험에 가입한 운전자가 사망, 중상해, 중과실에 해당하는 사고만 내지 않았다면 형사책임을 묻지 않아 세계에서 유일한 ‘가해자 보호법’이라는 비판이 있어 왔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