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공무원은 도대체 누구 편인가요? 외국에선 자기네들에게 오라고 손짓하는데 정작 한국에선 지원을 요청해도 규제에 막혀 사업을 시작조차 못합니다. 외국이 더 편해요.”
● 해외는 사업하도록 정부가 돕는다
인공지능(AI), 증강현실(AR) 기반 맞춤형 안경테 추천 서비스를 제공하는 블루프린트랩의 신승식 대표(42)는 지난해 유럽으로 진출했다. 규제를 피해 해외로, 이른바 ‘규제 이민’을 떠난 것이다.
블루프린트랩은 고객이 ‘셀카’ 이미지를 올리면 이를 분석해 어울리는 안경테를 추천하고 다양한 안경 모델을 가상으로 착용해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신 대표는 “국내에서 먼저 사업을 시작하고 싶었지만 국내에선 안경 원격 구매가 막혀 있는 데다 얼굴 이미지 사용에 대한 규제 장벽이 높아 해외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블루프린트랩은 현재 영국 맥라렌과 프랑스 라미에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탈리아 브랜드 구치와도 협업을 진행 중이다.
블루프린트랩이 진출한 유럽연합(EU) 소속 국가들에도 비슷한 규제가 있는 건 마찬가지다. 다만 스타트업의 기술력을 높이 평가하는 네덜란드 프랑스 룩셈부르크의 정부 공무원들은 사업을 저해하는 규제 해결을 돕겠다고 나섰다고 한다.
신 대표는 “EU 국가에도 개인정보보호법(GDPR) 같은 엄격한 규제가 있지만 명시된 요건을 충족하고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정부가 돕는다”며 “국내에서 규제와 싸우며 애를 먹느니 해외로 눈을 돌리는 건 당연하다. 본사를 자국으로 옮기면 규제 개혁과 세제 혜택까지 주겠다는 제안이 많은데 옮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했다.
● 해외에서 일단 검증부터 받고 오라
VR 입체음향 오디오 기술을 개발한 가우디오랩은 국내 사업은 일단 보류하고 해외로 진출해 기술력을 인정받은 기업이다. 2014년 오디오 기술의 국제표준을 정하는 MPEG(Moving Picture Experts Group) 국제회의에서 ‘동영상 오디오 표준’으로 채택됐다. 2017년엔 영국에서 열린 ‘VR어워드’의 혁신기업으로도 뽑혔다.
그런 가우디오랩은 정작 한국에선 인정받지 못했다. 정부에 지원을 요청해도 기술력을 평가할 만한 전문가가 없었다. 오현오 대표는(46)은 “회사 기술이 국제표준으로 채택되는 동안 정부에선 이 기술을 심사할 전문 인력이 없었다. 사업 지원 심사에선 ‘해외에서 일단 검증부터 받고 오라’고 하니 정부에 아예 기대를 하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또 “세계 각국은 자국 기업의 기술이 산업계의 표준으로 채택되고 상용화되도록 돕고 있는데 한국에선 반대”라며 “공무원들이 국내 표준 기술 채택 심사에서도 브랜드 이름이 더 익숙한 미국의 음향기업 돌비 등 외국 기업의 기술력을 우대한다”고 했다. 가우디오랩은 현재 미국 시장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 ‘한국선 왜 안 되냐’고 해외서 되물어
한국NFC의 황승익 대표(46)는 최근 “한국에서 서비스를 출시하려고 몇년 동안 노력했지만 이제 포기했다”고 밝혔다. 한국NFC는 스마트폰 앱만 설치하면 근거리무선통신(NFC) 기술을 이용해 고객으로부터 카드 결제를 받을 수 있는 핀테크 서비스를 개발했다.
신용카드 단말기를 구매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소상공인층의 수요가 높았다. 전자결제시스템 사업자를 통해 서비스 중인 한국NFC는 정부에 카드 가맹점 자격 요건을 확대하고 단말기 인증 규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금융위원회는 “건전한 신용카드 거래질서를 해칠 수 있다”며 사업을 막았다.
처음엔 황 대표도 규제 개선에 기대를 걸었다. 지난 2년 동안 5개 정부 부처 공무원들을 만났고 법률 자문료로 수천만 원을 썼다. 하루에 수십 번씩 담당 부처에 전화도 해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새 담당자가 오면 “제가 업무를 잘 모른다”며 회피하기 일쑤였다. 최근 마지막 기대를 걸고 신청한 규제샌드박스에서도 탈락했지만 누구도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결국 황 대표는 일본과 미국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규제가 꼭 필요하다면 적어도 글로벌 시장과 비슷한 수준으로는 맞춰져야 한다”며 “해당 규제가 없는 미국 일본 정부와 투자자의 도움으로 현재 사업 성과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황 대표는 정부의 신산업 육성 정책에도 의문을 표했다. 그는 “규제에 막혀 국내 사업을 시작도 못해본 스타트업들을 상대로 해외 진출만 장려하는 정부 정책은 모순 덩어리”라며 “해외 정부와 기업이 ‘이 좋은 기술이 정작 왜 한국에선 안 되느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 아니냐’고 물을 때마다 한숨이 나온다”고 토로했다.
▼ “스타트업 놓치면 미래 일자리 사라져” ▼
전문가들 ‘규제 이민’ 대책 촉구… “산업-인력 생태계 붕괴하고 있어”
스타트업의 규제 이민은 일자리 창출에도 적지 않은 타격을 가하고 있다.
곽노성 한양대 과학기술정책학과 특임교수는 “이제까지 스타트업 기업들은 한국에서 일군 성공을 기반으로 한 해외 진출을 지향했지만 최근 들어 규제를 피해 ‘불가피한 선택’으로 한국에서 사업을 포기하고 해외로 나가는 현상이 많아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스타트업은 해당 국가의 혁신 성장을 도울 뿐만 아니라 고용 창출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며 “규제 합리화 작업을 통해 스타트업의 성장을 이끌고 이를 고용 창출로 유도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경우 과거 30년간 기존 기업들의 일자리는 매년 100만 개씩 줄었지만 스타트업이 매년 300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며 전체 고용시장의 성장을 이끌었다.
스타트업의 고용 창출 효과는 한국에서도 커지고 있다. 최근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국내 벤처투자액이 역대 최대(약 3조4000억 원)를 기록한 지난해 벤처투자 기업 1072개사가 고용한 인원은 4만1199명이었다. 특히 고용증가율은 20.1%를 기록했다. 이는 중소기업의 고용증가율(1.6%대)을 훨씬 상회한다. 하지만 규제로 인해 스타트업의 해외 진출이 앞으로 더 늘어나면 고용 창출 효과는 뚝 떨어질 수 있다. 4차 산업의 핵심인 정보기술융합 사업은 공장 같은 물리적 장비를 투자할 필요가 적어 해외 진출의 장벽이 낮은 편이다. 특히 자동 통역 기술로 한국 기업의 걸림돌로 꼽히던 언어장벽이 낮아졌다. 곽 특임교수는 “근무환경에 대한 각종 규제가 가세하면서 스타트업계 인력들이 해외로 나가면 산업생태계뿐만 아니라 인력생태계까지 무너지는 것”이라며 “국가적인 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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