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어려서부터 뛰어놀기를 좋아했다. 집밖 곳곳이 놀이터였다. “그야말로 골목대장이었죠. 하하.” 워낙 밖에 나가기를 즐기던 그였기에 여행에 끌린 건 어쩌면 당연했다. 1995년생 김진영 씨는 9일 기자를 만나 자신의 여행 계획을 말했다. 가고 싶은 곳이 끊이질 않았다.
“당장 다가올 주말에는 속초를 가려고 해요. 그쪽에 산불이 났다니 미안해서 가야 되나 싶었는데 기사를 보니 ‘제발 좀 와 달라’고 하더라고요. 작년에 처음 제주도 갔는데 또 가고 싶고, 가을 되면 단풍 예쁜 내장산도 가야죠.”
김 씨의 여행은 조금 특별하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휠체어에서 지낸다. 근육이 점점 소멸돼가는 듀센형 근육병을 앓고 있다. 몸에 이상을 느낀 건 여섯 살 때였다. 갑자기 걷는 게 불편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했다. 5년 후 걸을 수 없게 됐다. 그때부터 고향인 경북 영주를 떠나 장애인복지시설인 경기 광주 ‘SRC 보듬터’에서 지냈다. 그곳에서 중·고등학교 과정을 모두 마쳤다.
“집에 있으면 혼자 지내야 하는 시간이 많은데 복지시설에 들어가니까 친구들도 사귀고 여러 활동도 하고 좋았던 것 같아요.”
그는 자신에게 닥친 장애를 덤덤히 받아들였다. 뛰어노는 친구들을 바라봐야만 하는 건 아쉬웠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원망한 적은 없다. 가끔은 상처를 받았다. 휠체어를 타고 부딪치는 세상은 불편함의 연속이다. 전철을 탈 때 휠체어 바퀴가 객차와 플랫폼 사이에 끼는 일이 다반사다. 자꾸 끼다 보니 요령도 생겼다. 사선으로 들어가면 그나마 낫다. 더 불편한 건 주변인들의 시선과 말이다.
“붐비는 지하철 속에서 힘겹게 휠체어를 타고 있으면 종종 할아버지들이 뒤에서 혼을 내요. 왜 복잡한 시간에 나와서 불편을 끼치느냐고. 세금으로 지원 받으면서 그러면 안 된다고. 같이 싸울 수는 없으니 그저 듣는 수밖에 없죠.”
동정어린 시선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어떤 할머니는 갑자기 다가와서 가엽다며 얼굴을 쓰다듬기도 했다. 처음 보는 성인의 얼굴을 만지는 건 그가 장애가 없었다면 감히 생각하기 힘든 일이다. 그처럼 근육병을 앓는 사람의 몸을 함부로 만지는 건 그 사람을 심각한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다. 에어컨 바람을 피해야 하는 김 씨는 여름에도 긴팔을 입을 때가 많다. 김 씨와 동행한 활동보조사에게 ‘너는 반팔 입으면서 왜 (저 사람은) 긴팔을 입혔느냐’며 역정을 내는 할머니도 있었다.
“비난이든 동정이든 과도한 관심은 달갑지 않아요. 그냥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아요.”
시련을 겪었지만 그는 꺾이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장애인 이동 차량을 구매했다. 장애인 콜택시처럼 휠체어 두 대를 실을 수 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여행의 시작이죠.” 그는 자신의 여행을 기록으로 남겨 많은 이들에게 전하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전국 일주는 꼭 해보고 싶긴 한데 ‘휠체어 전국 일주’는 왠지 누가 먼저 했을 것도 같고, 색다른 뭔가 없을까요?”
얼굴에는 설렘이 가득했다. 풍경을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는 기차여행도 좋다고 했다. 서른이 되기 전에 유럽 여행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중요한 이유다. 그는 다른 장애인 2명과 함께 5년간 살던 장애인자립생활주택에서 나와 조만간 혼자 살 집을 구할 생각이다. 일을 하겠다는 의지도 강했다. 넉 달 전부터 재택근무로 한 식품회사의 온라인 홍보 업무를 했다. 일을 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생활하고 여행하고. 그가 그렸던 미래는 평범하고 동시에 간절했다.
안타깝게도 그의 여행은 여기까지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고 며칠 후 폐렴 증세로 입원해 15일 밤 갑작스레 숨을 거뒀다. 허망한 죽음 앞에 주변 사람들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이런 말을 했다.
“세상 속으로 나오고 싶어도 두려움에 망설이는 장애인들이 있는데 막상 부딪혀 보면 충분히 할 수 있는 거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세상의 편견이나 시선에 너무 신경 쓰거나 연연하지 말라는 말도요.”
그는 부모님한테는 “나 하고 싶은 거 열심히 하면서 잘 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전해달라고 했다. 누구보다 멋진 여행을 꿈꿨던 24세 청년 김진영 씨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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