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 넷째 아들 정한근, 도피 21년만에 붙잡혀
타인 신상 정보 이용해 美·캐나다 시민권 취득
에콰도르서 미국 출국하려다 파나마서 적발돼
검찰, 정씨 도피 과정 경위 등 추가 수사 방침
정태수(96) 전 한보그룹 회장의 넷째 아들 정한근(54)씨가 해외 도피 21년 만에 붙잡혀 국내로 송환됐다. 정씨는 타인의 신상 정보를 이용해 캐나다,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는 등 신분을 세탁해서 도피 행각을 벌인 것으로 조사됐다.
23일 검찰에 따르면 대검찰청 국제협력단(단장 손영배)은 추적 10개월여 만에 해외 도피 중이던 정씨를 송환하게 됐다.
정씨는 지난 1997년 11월 한보그룹 자회사 동아시아가스를 운영하면서 회사가 보유한 주식 매각자금 322억원을 빼돌리고, 이를 스위스 비밀계좌에 숨긴 혐의를 받고 있다.
정씨는 지난 1998년 검찰 수사가 받던 중 잠적했고, 검찰은 공소시효를 감안해 지난 2008년 9월 정씨를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횡령) 등 혐의로 먼저 재판에 넘겼다. 그러나 정씨의 소재 불명으로 재판은 진행되지 못했고, 오는 2023년 9월까지 재판이 확정되지 않으면 형사소송법상 재판시효가 경과돼 법률상 처벌이 불가능한 상황이 됐다.
이후 검찰은 지난 2017년 6월 정씨가 미국에 체류 중이라는 언론 보도를 단서로, 지난해 4월 미국에 범죄인인도를 청구했다. 그러나 정씨의 미국 내 소재지가 확인되지 않았고, 후속 절차는 진행되지 않았다.
이에 검찰은 지난해 8월부터 정씨 주변인물을 중심으로 기록을 검토한 결과 정씨 가족이 캐나다에 거주하고 있는 사실을 확인했다. 검찰은 캐나다 국경관리국 일본주재관의 협조를 받아 정씨 가족 서류를 확인했고, 캐나다 시민권자인 A(55)씨의 이름으로 정씨 가족을 도운 정황을 포착했다.
검찰은 조사를 통해 A씨가 국내에 거주하고 있고, 캐나다에 간 사실이 없는 것으로 파악했다. 검찰은 정씨가 A씨의 이름을 이용해 신분을 세탁한 것으로 보고, 미국 국토안보수사국으로부터 지문 정보를 확인해 대검 국가디지털 포렌식센터(NDFC)의 감정 절차를 진행했다.
이를 통해 검찰은 정씨가 A씨의 이름 등 신상 정보를 이용해서 캐나다와 미국의 영주권 및 시민권을 취득한 사실을 확인했다. 또한 정씨가 미국 시민권자 신분으로 에콰도르에 입국, 거주하고 있는 사실을 확인해 송환을 시도했다.
검찰은 법무부 국제형사과, 외교부를 경유해서 에콰도르 대법원에 정씨 범죄인 인도를 청구했다. 검찰은 에콰도르 현지로 출장을 나가 대법원장과 검찰총장과의 면담을 가졌고, 송환을 위한 협조도 요청했다.
그러나 에콰도르와 한국 사이에선 범죄인인도조약이 체결되지 않았고, 에콰도르법은 공소시효 정지 사유가 한정적인 점 등을 이유로 검찰의 정씨에 대한 범죄인 인도 청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검찰은 강제추방절차를 통해 정씨를 송환키로 했다.
그러던 중 검찰은 정씨가 지난 6월18일 미국 LA를 목적지로 출국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에콰도르 내무부로부터 전달받았다. 검찰은 정씨가 파나마를 경유해 미국에 입국하려는 점을 확인했고, 파나마 당국에 협조를 요청했다.
검찰의 요청을 받은 미국 국토안보수사국은 파나마 이민청에 인터폴 적색수배자인 정씨 정보를 전달했고, 파나마 이민청은 정씨를 공항에서 붙잡을 수 있었다. 이후 검찰은 법무부와 외교부, 파나마 등 재외공관, 경찰청 등과 협의를 거쳐 브라질(상파울루), UAE(두바이)를 경유해 정씨를 국내로 송환할 수 있었다.
국제협력단은 정씨 송환 경유지인 두바이로 호송팀을 급파했고, 호송팀은 지난 21일 두바이에서 정씨를 인도받았다. 정씨는 입국 전 피로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며 탑승을 거부했고, 의료진의 진료 이후 전날 국내로 송환됐다.
국제협력단 관계자는 “앞으로도 법무부, 외교부, 경찰청 등 관련 부처와 주요 해외 법집행기관과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중요 해외도피사범의 송환에 주력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서울중앙지검 외사부(부장검사 예세민)는 정씨가 입국하자 곧바로 호송한 뒤 도피 경로 등을 조사했다. 외사부는 향후 정씨가 A씨 이름을 사용하게 된 경위 등에 대한 조사와 함께 정씨가 허위 사실로 시민권을 취득했는지 등 여죄를 추가 수사할 방침이다.
정씨가 송환됨에 따라 아버지인 정태수 전 한보 회장에 대한 행방 역시 주목받고 있다. 정 전 회장 또한 2127억원의 국세를 체납한 혐의 등으로 항소심 재판을 받던 중 지난 2007년 치료 명목으로 일본으로 출국했다가 행적을 감춘 상태다. 검찰은 정씨를 상대로 아버지 정 전 회장의 행적 등을 확인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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