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괴롭힘에 시달렸던 A씨는 가장 답답했던 것이 자신의 문제를 어떤 창구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A씨 외에도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한 피해자들은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구체적인 방법을 몰라 ‘그냥 참고 넘기는’ 경우가 많았다.
16일 일명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라고 불리는 개정 근로기준법이 시행 첫날을 맞았다. 법 시행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직장인들이 과거보다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법적 기준이 마련됐다는 평가가 있지만, 괴롭힘에 대한 정의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처벌기준도 마련돼 있지 않아 현장에서 실효성이 있을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더욱이 영세 사업장의 경우에는 법 시행에 따른 취업규칙 개정 등의 법 시행 사전조치가 취해지지 않은 곳이 많고, 직장인들도 이번 법 개정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법이 현실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취업규칙 변경하고 담당자 지정해야
근로자를 10명 이상 상시 고용하는 모든 사업장은 고용노동부가 정한 매뉴얼에 따라 법이 시행되는 16일까지 직장 내 괴롭힘의 예방과 발생 시 조치에 대한 사항을 취업규칙에 반영한 뒤 이를 관할 지방고용노동관서에 신고해야 한다. 취업규칙에 반영하지 않았을 때는 사용자가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게 된다.
물론 이날까지 취업규칙을 변경하지 않았다고 해서 곧바로 처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법 시행과 동시에 취업규칙을 변경하지 않은 사업장을 처벌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취업규칙에 관련 내용이 반영되지 않았다는 신고를 받으면 25일 동안 시정할 기회를 주고 이를 한차례 연장할 수 있다”고 밝혔다.
다만 직장 내 괴롭힘에 문제를 제기한 직원에게 불이익을 준다면 즉각 처벌받을 수 있다. 만약 사용자가 괴롭힘 발생 사실을 신고하거나 피해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직원에게 해고 등 불이익을 줬다면 3년 이하의 징역,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한편, 개정 근로기준법에서는 직장 내 괴롭힘을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Δ개인사 소문 내기 Δ음주·흡연·회식 강요 Δ욕설·폭언 Δ다른 사람 앞에서 모욕감을 주는 언행 Δ정당한 이유 없이 연차 못쓰게 하기 Δ지나친 감시 등 구체적인 괴롭힘의 유형을 16가지로 정리했다.
◇사용자 처벌 못하고, 규정 모호하다 지적도
개정 근로기준법은 직장 내 괴롭힘을 법적으로 규정했다는데 의미가 있지만 결국 가해자를 처벌할 규정을 두지 않아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사용자가 회사 내부적으로 가해자를 징계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이를 강제할만한 조항도 없다.
특히나 조사와 처벌 권한을 사용자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회사 대표가 괴롭힘의 주체일 경우 법이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고용노동부가 배포한 ’직장 내 괴롭힘 판단 및 예방·대응 매뉴얼‘에는 대표이사의 경우 감사가 이사회를 소집해 사건을 조사하고 징계를 하도록 돼 있는데 이사들이 대표를 징계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고용노동부는 “개정법은 직장 내 괴롭힘을 법으로 금지하되 처벌보다는 사업장에서 취업규칙 등을 통해 자율적으로 예방·조치하는 시스템을 구축도록 하는 데 중점을 뒀다”고 밝혔다.
관련 문제를 지속해서 제기해온 시민단체 ’직장갑질119‘는 “괴롭힘이 발생한 사업장에서 사용자가 처벌되는 경우는 사용자가 신고 노동자 또는 피해 노동자에게 불이익 조치를 했을 때뿐”이라며 “그 외의 경우 법상 사용자의 의무가 규정돼 있지만 이를 위반하더라도 형벌·과태료가 부과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사용자 측에서도 불만이 나온다. 규정이 모호해 기업들이 혼란을 겪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박준 대한상공회의소 기업문화팀장은 “정부가 ’직장 내 괴롭힘 판단 및 예방·대응 매뉴얼‘을 발간했지만 여전히 모호한 규정 등으로 부작용과 집행 부담에 대한 우려가 있다”며 “법은 최소한의 보완책일 뿐이며 괴롭힘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조직원 간 갈등을 줄이기 위한 기업문화 개선 활동을 병행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더불어 이준희 한국경영자총협회 수석위원은 최근 한 포럼에서 “저성과자에 대한 성과향상 촉진 조치를 당사자가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주장하면 마땅히 대응할 방법이 없다”며 “체계적인 성과평가 절차와 성과 미달자 교육 등 절차를 성문화해 분쟁의 소지를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직장인들 “법 잘 몰라”…중소기업은 “준비 안 돼”
그동안 관련법에 대한 홍보가 제대로 이뤄졌는지도 의문이다. 최근 설문결과 직장인들은 괴롭힘 금지법 시행에 대해 잘 모르거나 기대도 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6월 26일부터 7월 1일까지 직장인 1287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진행한 결과 응답자 61%가 법안 시행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앞서 언급한 직장갑질119가 지난달 27일부터 이달 1일까지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괴롭힘 금지법 시행을 알고 있냐는 질문에 66.6%가 ’모르고 있다‘고 답했으며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작년 12월 국회를 통과한 이후 변화가 있었는지를 묻는 질문에 68.1%가 ’변화가 없다‘고 답했다. 괴롭힘이 줄었다는 응답은 31.9%였다.
취업규칙 개정 등의 법 시행에 따른 사전 조치도 아직 이뤄지지 않은 기업들이 있어 이를 계도하는 작업들이 필요해 보인다. 삼성과 현대차, LG와 SK 등 대기업에서는 법 시행 전부터 관련 조치를 취했지만 영세한 중소기업의 경우 취업규칙을 변경했는지 상황 파악도 되지 않는 실정이다.
1주일 전인 지난 9일 대한상공회의소가 국내 기업 300곳의 인사담당자를 대상으로 실시해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34.6%는 조치를 완료했고 50.5%는 조만간 완료할 예정이라고 밝혀 조치를 세우지 못한 기업은 14.9%에 그쳤다.
하지만 기업 규모별로 보면 조치 못했다는 답변 비율은 대기업 6.9%, 중견기업 15.9%, 중소기업 19.9%로 기업 규모가 작아질수록 높아졌다. 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는 “중소기업에서는 이 법이 있는지도 사실 잘 모르는 상황일 것 같다”며 “대부분의 기업들은 이에 무관심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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