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피플 in 뉴스]간송 전형필과 훈민정음 상주본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7월 17일 03시 00분



일제강점기 일제는 ‘훈민정음해례본(解例本)’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해례본은 세종 28년(1446년)에 나온 초간본으로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최항, 박팽년,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 8명의 집현전 학자가 집필한 훈민정음 원본입니다. 일제는 이를 파기함으로써 한글 창제 근거를 없애고 우리 민족정신의 뿌리를 말살하고자 한 것이지요.

이때 간송 전형필 선생(1906∼1962·사진)이 구세주처럼 나타납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이미 동아시아에 널리 이름이 알려진 문화재 수집가였습니다. 1940년경 김태준이라는 사회주의 계열 국문학자로부터 해례본의 실존 소식을 접한 간송은 목숨을 걸고 해례본 찾기에 나섭니다. 간송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훈민정음해례본은 간송의 품에 들어갑니다. 간송은 이를 비밀리에 지켜오다가 광복 후 조선어학회 학자들에게 영인본을 공개하며 한글 연구에 박차를 가하도록 합니다.

해례본이 알려지기 전까지 학자들은 한글 창제의 원리를 추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대 글자 모방설, 범자(梵字) 기원설, 몽골문자 기원설, 창살 모양 상형설 등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이때만 해도 우리 한글의 독창성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간송이 소장한 해례본을 통해 한글이 인체 발음기관을 상형화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한글은 백성의 문맹 퇴치를 위해 창제된 인류 최초의 언어이며 발음기관을 본떠 만든 최초의 언어로 기록됩니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해례본(간송본)은 1962년 12월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10월에는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됩니다.

유네스코에서는 1990년부터 매년 문맹 퇴치에 공이 큰 사람들에게 ‘세종대왕 문맹 퇴치상(King Sejong Literacy Prize)’을 주고 있습니다.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이 가장 배우기가 쉬워 문맹을 없애기에 최적의 글자임을 세계가 인정한 겁니다.

훈민정음에는 해례본 외에도 해례본을 한글로 풀이한 언해본(諺解本)이 있습니다. 세종이 직접 지은 언해본은 한글을 만든 이유와 한글 사용법을 간략히 설명한 글로 흔히 ‘훈민정음 예의본’이라고도 합니다.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되는 문장은 언해본 첫머리에 나오는 글입니다.

훈민정음 원본인 해례본에는 간송에 의해 보관된 간송본 외에 상주본이 있습니다. 2008년 처음 존재가 드러난 이 상주본 문제로 시끄럽습니다. 현재 상주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배익기 씨입니다. 골동품상으로부터 구입했다고 주장하는 배 씨는 소유권 관련 수차례의 소송에서 모두 패소했습니다. 15일 대법원은 배 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국가 손을 들어줬습니다.

이로써 국가는 상주본을 확보할 수 있게 됐으나 그 소재를 아는 유일한 사람인 배 씨는 대가로 1000억 원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가 마음을 바꾸지 않는 한 찾을 방법이 없는 난감한 상황입니다. 배 씨의 요구는 정당한 사익 추구 행위로 봐야 할까요. 한일 간 경제 전쟁이 불붙고 있는 요즘 세종대왕의 애민정신, 간송의 애국심이 새삼 그립습니다.

박인호 용인한국외대부고 교사
#간송 전형필#훈민정음#상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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