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집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제4권에 담긴 안법순 할머니(1925~2003)의 증언이다. ‘휘뚜루마뚜루’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마구 해치우는 모양’을 가리키는 우리말이고, ‘나라비(ならび)’는 ‘늘어선 모양’을 뜻하는 일본어다. 한국어와 일본어가 뒤섞인 문장엔 안 할머니가 열일곱 살 때 싱가포르에서 당한 폭력의 참상과 마음속 응어리가 녹아 있다. 이처럼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정서를 고스란히 담아냈다고 평가받는 증언집 제4권이 2001년 발간된 지 18년 만에 영어와 일본어로 번역돼 곧 미국과 일본 등에서 출판되는 것으로 11일 확인됐다. 영어 번역은 서울대 여성연구소(소장 양현아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와 미국 어바인 캘리포니아대가 반년 넘게 매달린 공동 작업의 결과다. 일본어 번역은 한국·미국 연구팀과는 별도로 진행됐다. 김부자 도쿄외국어대 교수와 일본 시민사회 등이 자체적으로 나서 올 4월 제4권의 일본어 번역을 완료한 것으로 알려졌다.
○ ‘여비(旅費)’ 표현 옮기면서 ‘트래블’ 단어 버려
피해 할머니들이 쓴 단어를 강제 연행 당시의 맥락에 맞게 번역하는 작업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여비’라는 단어가 그랬다. 김화선 할머니(1926¤2012)는 “팔일오(8·15) 해방이 돼도 못 와 내가. 여비가 없어서”라며 독립 후에도 2년간 싱가포르에 머물러야 했던 과거를 한탄했다. 번역팀은 고심 끝에 여비를 ‘여행비(money for travel)’가 아닌 ‘집으로 돌아올 삯(money for the fare back home)’으로 풀어 옮겼다. 성매매였다는 일본 우익의 주장과 달리 위안부 피해 생존자 대다수는 광복 후 집으로 돌아올 돈도 없어 고생했다는 사실을 명확히 드러내는 번역이라는 판단에서다.
방언(方言) 사전에도 없는 사투리를 옮길 땐 향토학 연구 수준의 조사가 필요했다. 제4권에 등장하는 할머니 9명 중 유일한 생존자인 윤순만 할머니(90)는 “먹을 게 없어서 (나물을) ‘징지가루’로 무쳐 먹었어”라며 궁핍했던 위안소 생활을 증언했다. 연구팀은 징지가루의 뜻을 찾기 위해 윤 할머니의 고향인 충북 지역 노인들을 찾아다녔고, ‘보리 등을 마지막까지 털고 남는 가루’라는 뜻풀이를 번역본에 담을 수 있었다.
번역 과정에서 증언의 숨은 의미가 드러나기도 했다. 연구팀은 윤 할머니가 증언 도중에 부른 일본어 노래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일본인 인맥을 총동원했다. 그 결과 윤 할머니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위안소에서 배운 일본 영화의 주제가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던 점을 밝혀냈다. ‘피해 할머니가 먼 옛날 일을 어떻게 기억해서 증언하느냐’라는 일각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증거였다.
피해 할머니의 감정을 담은 감탄사는 가급적 소리 나는 대로 영어로 옮겼다. “아이구”라는 할머니들 고유의 탄식은 발음 그대로 “Aigoo”로 옮기고 ‘한숨 소리’라고 따로 표시했다. 일본군 가해자를 가리키는 ‘손님’이라는 단어가 ‘성구매자’라는 뜻으로 잘못 읽히지 않도록 “일본 군부가 쓴 표현을 할머니들이 그대로 따라한 것”이라는 각주를 달았다.
○ 증언 ‘주체성’ 살려 옮긴 번역 드림팀
현재까지 각계에서 발간된 위안부 피해 증언집은 10권이 넘는다. 하지만 할머니들의 증언을 시간순으로 재배열하거나 문장을 다듬지 않고 욕설까지 그대로 옮긴 것은 제4권이 처음이다. 그 배경엔 2000년 12월 도쿄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 있다. 이 법정은 한국을 포함해 8개 피해국의 시민단체들이 마련한 것으로 사법적 강제성은 없었다. 하지만 당시 남북공동검사단의 검사를 맡은 양현아 교수는 피해를 증언할 할머니들의 주체적인 목소리를 담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8월 설립된 여성가족부 산하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구소’가 첫 번째 번역 과제를 제4권으로 결정했다. 제4권의 집필을 주도했던 양 교수가 번역 작업을 총괄하고 위안부 관련 논문이 1997년 미국의 학술지에 처음 실리도록 주도한 최정무 어바인 캘리포니아대 교수가 참여하면서 ‘드림팀’이 구성됐다. ○ “이제는 전 세계인이 증인”
연구자들은 제4권의 번역이 다른 증언집 번역의 ‘신호탄’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독자와의 상호작용, 해외 연구팀의 제안, 한국 정부의 지원, 한국 연구팀의 협업이라는 ‘4박자’가 중요하다. 이 문제에 대한 연구를 이어오는 유엔 인권이사회, 국제사법재판소 등 국제기관이 번역본을 구비할 것으로 보인다. 최 교수는 “위안부 문제가 교과서에 담겨 있는 캘리포니아주 고등학교에서는 부교재로 사용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번역 결과는 13일 서울시청에서 서울시와 서울대 여성연구소가 공동 주최하는 국제심포지엄에서 발표된다. 미국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는 마이크 혼다 전 연방 하원의원도 심포지엄에 참석한다. 양 교수는 “독자들이 할머니의 기억 회로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번역했다”며 “번역본을 읽는 전 세계인이 모두 증인”이라고 설명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