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및 단체협상을 놓고 벌이는 파업은 우리에게는 흔한 모습이다. 올해도 여름휴가가 끝나는 이달 중순부터 현대·기아자동차, 한국GM 등 완성차 노동조합은 물론이고 현대중공업, 인천제철 등 조선·제철 분야에서 줄줄이 파업을 예고하고 있다. 파업은 노조의 가장 큰 무기지만, 과연 얼마만큼 실익이 있는 걸까. 이정묵 SK이노베이션 노조위원장(57)은 “이제는 노조도 조합운동과 노동운동을 구별해야 한다”고 말했다. SK이노베이션 노조는 올 3월 30분 만에 임금협약을, 지난달 29일에는 교섭 3주 만에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초면에 실례인데 혹시 어용 노조 아닌가.
“하하하, 어용인지 아닌지를 내가 말해야 소용없고…. 개인적으로는 어용이니 강성이니 하는 이분법적 흑백논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노조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1997년에 해고됐는데 해고되는 어용도 있을까?” (왜 해고된 건가?) “당시 노조 운영을 위원장이 거의 독단적으로 했다. 지금은 노사가 잠정 합의를 하면 대의원 대회에 보고하고 찬반투표를 통해 결정하지만, 당시에는 위원장이 직인을 찍으면 끝이었다. 조합원의 공감대가 형성되기 전인데도 일단 결정했으니 따르라는 식이다. 그래서 노조 바로 세우기 운동을 했는데 회사가 울산에서 서울로 근무지 이동 발령을 냈다.”
―노조 바로 세우기는 회사로서는 좋은 일인데 왜 서울로 발령을 낸 건가.
“노조 집행부 불신임 운동을 했는데 주동자인 나를 솎아내야 조직이 와해되니까…. 기존 노조는 물론이고 당시에는 회사도 나를 불편해했던 것 같다. 부당 전직이라고 생각해 울산으로 출근투쟁을 했는데 무단결근으로 해고됐다.”
그는 입사 전에는 노동운동을 하지 않았다.
―위원장은 어떻게 당선된 건가. 기존 노조나 사측에서는 달갑지 않았을 텐데….
“법적 투쟁을 거쳐 2001년 복직한 뒤 2008년 출마해 당선됐다. 그런데 그 6, 7년 사이에 분위기가 좀 바뀌었다. 강성 투쟁이 이익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거다.” (노사 대립이 심했나?) “무조건 대립과 충돌을 통해 얻으려 했으니까…. 처음에는 좀 먹혔는데 몇 년 하다 보니 회사도 내성이 생겨 잘 안 통했다. 그러다 보니 충돌이 더 자주 일어났고 결국 중재위원회까지 가서 직권 중재를 받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고도 결과는 조금씩 양보한 것보다 못했고…. 머리띠 매고 목소리만 크다고 장땡이 아니라는 걸 안 거다.”
―중재위는 조정이 결렬되면 정당한 파업권을 얻기 위해 가는 곳 아닌가. SK이노베이션은 필수공익사업장이라 당시에는 파업권도 없었는데 왜 간 건가.
“내친김이니까 기 싸움으로 간 거지…. 다른 회사는 중재위 조정이 안 되면 파업을 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게 안 되니까 직권 중재를 받으면 그걸로 끝이다. 중재를 받으면 조금 더 얻을 거라는 기대도 있었고….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2008년 이전까지 필수공익사업장은 파업권이 없는 대신 국가가 직권중재를 통해 분규를 해결했다. 2008년 직권중재 제도가 폐지되고 파업권이 보장됐으나 대신 필수인력을 남겨두도록 했다.
―2017년부터 임금 인상을 물가 인상만큼만 하고 있는데 이유가 뭔가.
“2008년 위원장을 할 때도 얘기했는데 그때는 깊게 논의하지 못했다. 2016년 출마하면서 공약으로 제시했는데… 고도성장기에는 몇십 %씩 임금이 올랐지만 성장이 정체되면서 임금인상률도 낮아지고 있다. 한계치에 온 건데… 더 이상 싸워서 임금을 계속 올릴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또 좋을 땐 올리고 안 좋을 땐 동결하는 식보다 적지만 꾸준히 오르는 임금 안정성이 더 중요하다고 봤다. 그래야 생활계획을 안정적으로 세울 수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 회사에 맞는 적정 임금인상률이 얼마인지 고민했고 지난 10년간 싸워서 얻어 낸 결과를 분석했더니 연평균 2.02% 인상이었다.”
―10년간 투쟁했는데 고작 2.02% 인상이었다는 건가.
“더 허망한 건 같은 10년간 연평균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2.34%였다는 점이다. 2015년에는 적자 때문에 임금이 동결됐다. 2016년에는 3∼4% 인상을 요구하며 그렇게 싸웠지만 결국 중재위에서 1.5%로 결정됐다. 처음부터 물가상승률만큼만 인상안을 제시했다면 노조 내부에서 난리가 났겠지만 사실은 싸우지도 않고 더 많이 받을 수 있었던 거다.”
(다른 수치가 높은 경제지표를 제시했으면 좀 더 많이 받을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수치가 높은 경제지표는 많다. 하지만 서로 간의 차이가 클수록 협상이 안 되지 않나.”
※SK이노베이션의 임금인상률은 2017년 1%, 2018년 1.9%, 2019년 1.5% 등 전년도 소비자물가 상승률만큼만 올랐다.
―회사가 흔쾌히 받아들였나.
“회사로서는 적자가 나도 올려줘야 하는 부담이 생긴다. 실적이 안 좋으면 기업이 가장 먼저 요구하는 게 임금 동결 아닌가. 적자 때는 중재위에 가도 노조가 이길 가능성이 별로 없다. 대부분 동결된다. 하지만 취지에 공감해 합의를 했다.”
―회사가 3년 연속 3조 원대의 영업이익을 냈다. 합의는 했지만 그래도 회사 실적이 좋은데 임금 인상이 너무 적은 것 아니냐는 불만은 없나.
“물가와 임금을 연동하는 데 반대했던 사람들 중에는 불만인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대다수 조합원은 해마다 75∼90% 이상 찬성으로 임금인상률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실적이 좋아졌다고 더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없다. 실적이 좋으면 성과급으로 받으면 된다. 회사도 그걸 인정했고 그래서 원래 1월에만 나오던 성과급을 2017년 단협에서 7월에도 주는 걸로 바꿔 지금 두 번 받았다. 기본임금은 안정적으로 가고 실적에는 성과로 배려하는 것, 이게 맞는 방향 아닌가.”
―최근 단협을 3주 만에 체결했다. 단협은 종류가 많아 수개월에서 1년 이상 걸리는 곳도 많은데 별다른 쟁점이 없었나.
“정년 연장(60→62세)과 통상임금이 가장 컸는데 둘 다 나중에 얘기하기로 했다. 정년 연장은 개별 회사가 먼저 치고 나가기가 부담스럽고, 통상임금은 소송 중이라 지금 합의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노조가 이 둘을 양보하는 대신에 회사가 다른 부분을 받아줘 빨리 끝났다.” (어떤 걸 얻었나.) “가장 큰 게… 우리 회사는 만 60세 되는 해 태어난 달에 정년퇴직을 한다. 그런데 매년 1월 받는 성과급은 그 전해에 12개월 만근을 해야만 받았다. 그걸 정년퇴직한 달까지 일한 성과급을 받을 수 있도록 바꿨다.”
―조합원들이 기부금을 걷어 협력사 직원들에게 보너스를 준다던데….
“어느 회사나 원청과 하청 직원 간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다. 우리가 작은 정성이라도 보여줌으로써 조금이나마 갈등을 줄이고 싶었다. 큰 금액은 아니지만 협력업체 직원들을 우리의 동료로 생각하고 있다는 마음의 표시다. 또 우리만 잘 먹고 잘살면 되는 시대도 지났다. 그래서 조합원들에게 우리도 좋은 일 좀 하자, 그리고 자긍심을 느끼자며 제안했다.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 매달 기본급의 1%를 내고 있다. 옛날에는 노동자를 속된 용어로 폄훼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다 고등교육을 받고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다. 노동자도, 노조도 생각을 바꿔야 하고 사회적 역할을 해야 한다.”
―자발적이라고는 하지만 올해 임금인상이 1.5%였는데 1%를 기부한다는 건가.
“이해가 안 갈 거다. 그런데도 조합원 대다수가 찬성했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기부를 하면 기업의 가치가 좋아지고, 회사도 노조에 더 마음을 열 거라고 생각했다. 취지가 좋다 보니 회사도 동참해서 조합원들이 낸 금액만큼을 매칭 방식으로 보태고 있다. 절반은 불우이웃 등 소외계층을 돕고, 절반은 협력업체 직원들에게 매년 1월 보너스로 전달한다. 올해도 60여 개사 4200여 명에게 총 23억6000만 원을 지급했다. 1인당 50만 원 정도다.”
―노동운동과 노조운동이 다르다고 했는데….
“누군가는 나를 보고 ‘저게 무슨 노동운동이야’라고 할 수 있지만…, 조합운동과 노동운동은 좀 다르다고 생각한다. 조합운동은 회사 안에서 조합원들의 권익을 향상시키고, 억압과 탄압을 막아주는 거다. 최대한 협상을 하다가 끝내 안 됐을 때는 노동운동으로 전환해서 싸울 수 있겠지만 시작부터 너희는 적이야 하는 식으로 싸우기만 하면 되나. 우리가 그러면 사측도 우리를 그렇게 볼 텐데 그럼 보따리가 안 풀린다. 그 구별을 하자는 거다.”
―노동 운동가들 사이에서는 강하게 투쟁하지 않으면 어용으로 매도되는 분위기가 있지 않나.
“그래서 주변에 이런 얘기를 자주 하는데… 시대 변화에 맞는 노동운동을 개발하는 게 결코 어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그런 노력보다 수십 년간 해오던 대로 협상이 잘 안 되면 머리띠 매고, 그래도 안 되면 관성적으로 파업했다. 사실 가장 편한 방식인데…. 투쟁도 대중이 인정해줘야 하는데 그런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명분과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방식을 개발하고 스스로 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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