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신 한국테니스진흥협회(KATA) 부회장(65)은 출산한 뒤 체중조절을 위해 테니스를 시작해 30년 넘게 즐기고 있다. 50대 후반 유방암이 찾아왔지만 테니스가 있어 거뜬히 이겨내고 ‘100세 시대’를 건강하게 맞고 있다.
“30대 초반에 아기를 낳고 살이 많이 쪘다. 뭘 할까 고민하다 바로 테니스를 시작했다. 학창시절 중교고교에 테니스부가 있었는데 테니스 치는 선수들이 멋있고 부러웠었다. 그중 한 친구는 유명한 선수가 됐다.”
1980년대 말이니 당시는 테니스가 대중화되지 않은 시절. 회사에 다니는 남편이 일본 출장을 갔을 때 사다준 테니스라켓을 들고 바로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아이가 갓 돌을 지났는데 유모차 끌고 테니스장으로 달려갔다. 너무 재미있어 하루 종일 테니스를 쳤다. 남편은 해외 연수와 출장을 자주 갔다. 난 테니스에 빠져들었다.”
김 부회장은 여성들이 자전거를 거의 타지 않을 때인 학창시절 시골에서 짐을 싣고 다니는 속칭 ‘짐빠’를 혼자 탈 정도로 운동신경이 있었다. 테니스도 바로 정복했다.
“당시 경기도 부평의 테니스클럽에서 배웠다. 운 좋게도 각종 대회에도 출전하는 남자 클럽이 있어 함께 훈련했다. 여자들은 서브 앤 발리를 꿈도 꾸지 못할 때 난 서브 앤 발리를 배웠다. 테니스 시작해 1년도 안 돼 잘 치는 언니들을 다 제압했다.”
테니스는 그에게 활력소를 줬다. 다이어트도 됐고 건강도 좋아졌다. 무엇보다 삶의 의미를 가져다 줬다. 라켓과 볼을 가지고 상대와 하는 게임이 너무 재밌었다. 테니스를 하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테니스동호회도 만들었다.
“1987년 풀잎클럽을 만들었다. 스포츠는 함께 즐겨야 재미있는 법이다. 함께 배우고 훈련하며 친목을 도모하기에 클럽만큼 좋은 것은 없다.”
김 부회장은 풀잎클럽 초창기 2~4대 총무를 지냈고 중간에 2년씩 회장을 2회 맡았다. 또 27~28회 회장을 했으니 회장만 6년을 했다. 지금은 고문으로 클럽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하고 있다.
테니스를 시작한 뒤 3년 뒤인 1990년 거북이배 대회에 출전해 처음 우승했다. 하지만 김 부회장은 1990년대 초반부터 약 10년간 대회출전을 하지 못했다. 회사를 다녔기 때문이다.
“테니스를 계속 치기는 했지만 대회에 출전하지는 않았다. 직장도 다녀야 해 평일엔 시간이 없었고 주말엔 종교생활을 했다. 하지만 꾸준히 연습했다. 서울로 이사 와서는 서초구에서 제일 좋은 클럽에 가입했다. 수요일과 토요일, 일요일 오후엔 테니스에 집중했다.”
2003년부터 다시 대회에 출전하기 시작했다. 직장도 그만뒀다.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테니스 대회 출전에 빠져들었다.
“딱 10년을 쉰 뒤 대회에 나갔다. 내가 처음 테니스를 칠 땐 대회도 없었는데 대회가 아주 많아졌다. 한 대회에서 우승하니 KATA에서 바로 국화부로 뛰라고 했다. 개나리부가 초보자고 국화부가 고수들 대회다. 국화부에서도 우승 많이 했고 입상도 많이 했다.”
다시 대회에 출전할 때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처음 테니스를 칠 때부터 친분이 있던 성기춘 KATA 현 회장에게 “올해 안에 톱10에 들게요”라고 했더니 “100위 안에나 들면 잘한 것”이라는 반응이 돌아왔는데 그해 연말 랭킹에서 8위로 톱10을 한 것이다. 김 부회장은 2007, 2008년 한일 친선여자테니스대회 한국 대표로도 활약했다.
그렇게 전국 대회를 다니며 테니스를 즐기고 있을 때 청천병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2011년 건강검진에서 유방암 판정을 받은 것이다.
“솔직히 남편의 건강염려증이 날 살렸다. 남편 때문에 매년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그해 유방암 진단이 나온 것이다. 눈앞이 깜깜했지만 다행히 초기라 수술 받고 치료해 나을 수 있었다.”
투병 중에도 테니스라켓을 놓지 않았다. 투병 6개월 만에 다시 테니스를 쳤다. 테니스를 치지 않으면 오히려 더 병이 악화될 것 같았다. 2012년엔 왼쪽 무릎 연골까지 파열됐다.
“몸을 추스르고 다시 끌어올리고 있을 때였다. 너무 컨디션이 좋아 열심히 테니스를 쳤는데 게임 도중 ‘뚝’ 소리와 함께 무릎 연골이 파열됐다. 통증 때문에 걸음도 못 걸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이러다 테니스도 못 치는 것 아닌가….”
테니스를 배우던 초창기 남편과 혼합복식을 치다가 남편에게 왼쪽 발목을 밟힌 게 화근이었다.
“중앙으로 오는 공을서로 치려다 남편이 내 발목을 밟았다. 당시 깁스를 2개월 했다. 일상생활에는 문제가 없었는데…. 당시 제대로 재활을 했어야 했다. 30년 넘게 테니스를 치면서 발목이 잘 안 돌아 가다보니 무릎에 무리가 간 것 같다. 결국 무릎 수술하고 한 달 뒤 발목도 수술했다.”
3,4년 재활하느라 고생했다. 하지만 10년 쉬고 다시 테니스 대회에 출전할 무렵부터 시작한 웨이트트레이닝이 큰 도움이 됐다.
“엘보 방지와 테니스를 더 잘 치기 위해 아파트 헬스클럽에 등록해 근육운동을 시작했다. 매일 1시간은 기본이고 혹 비가 와 테니스를 못 치면 2시간 이상 웨이트트레이닝을 한다. 실내 자전거도 탄다. 귀찮아서 좀 빠지면 바로 신호가 온다. 엘보가 오려고 하고 피곤하고. 근육운동과 스트레칭은 테니스를 위한 보약인 셈이다.”
2017년부터 제 컨디션을 찾았다. 걸을 때 약간 휜 것처럼 보였던 다리도 제 위치를 찾았다. 지난해부터 컨디션이 올라왔고 올해도 벌써 준우승을 한번 했다.
“5월 열린 부천시장배 테니스대회에서 준우승했다. 8강도 3번이나 올랐다. 올 가을엔 꼭 우승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김 부회장은 테니스 고수로 활약하며 해외 테니스 그랜드슬램대회를 다 관람할 기회도 가졌다. KATA에서 우수 아마추어에게 보내주는 프로그램 덕이다.
“2017년 프랑스오픈에 가서 정현을 응원했던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2018년 US오픈 때도 정현을 응원했다. 2012년엔 윔블던에 다녀왔고 올해는 호주오픈을 구경했다. 세계 최고의 테니스대회 현장에서 세계적인 선수들도 봤지만 멋진 관중 매너도 배웠다.”
‘운전 광’ 김 부회장은 올해부터 걷기를 생활화하며 몸이 다시 달라졌단다.
“테니스장 갈 때, 각종 대회에 출전할 때 항상 차를 몰고 다녔다. 원래 운전을 좋아해 가급적 차를 몰고 다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운전을 오래하면 고관절이 좋지 않았다. 운전하고 대회에 출전해서 고관절 때문에 성적이 좋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래서 올 봄부터는 가급적 운전하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걷고 있다.”
서울 반포 집 근처 테니스장까지 30분, 레슨 받는 곳까지 15분 등 걸어서 다닌다. 풀잎클럽이 모이는 부천종합운동장 테니스코트를 갈 때도 전철을 탄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꿈도 못 꾸던 일이다.
“요즘은 테니스를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초 수요클럽, 서초 화목클럽, 반포 한우리, 송파 공주클럽, 화요일엔 풀잎클럽…. 일요일만 빼고 매일 테니스를 친다. 대회가 있을 땐 대회에 출전한다. 여자부 대회는 주로 주중에 열린다. 주 2회 레슨도 계속 받고 있다. 레슨을 받으면 실력이 향상돼 자신감도 생기고 무엇보다 부상을 방지할 수 있다. 잘 쳐야 부상도 막는다. 대회는 한 달에 2,3개만 나간다. 매주 나갈 수도 있지만 즐기기 위해선 2,3개가 가장 좋은 것 같다.”
승리에 집착하지 않는 게 테니스를 즐기는 비결이다.
“솔직히 대회에 나가면 인이냐 아웃이냐 가지고 싸우는 사람들 많다. 너무 승리에 집착하면 테니스가 재미없어진다. 이기면 이기는 데로 성취감을 느끼고 져도 한수 배웠다는 생각을 가지면 테니스를 즐길 수 있다.”
김 부회장은 국화부에서 사실상 최고령이다. 테니스를 치고 있는 선배들 중 더 나이든 분도 있는데 대회 출전은 그가 최고령이다. 하지만 항상 젊게살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테니스를 즐기고 테니스를 더 잘 치기 위해 노력하다보니 병도 어느새 사라졌다.
“계속 검진했는데 어느 순간 완치 판정을 받았다. 아침에 일어나 스트레칭 체조 하고 오전 10시쯤부터 테니스 치고 오후에도 테니스를 치거나 레슨을 받는다. 저녁엔 웨이트트레이닝으로 마무리 한다. 이렇게 테니스와 함께 하는 삶이 너무 즐겁다.”
그는 최소 15년은 더 테니스를 치고 싶단다. 솔직히 세상을 뜨는 순간까지 치고 싶단다.
“테니스 광으로 알려진 고 민관식 전 문교부 장관은 돌아가시기 하루 전까지 테니스를 쳤다고 알려져 있다. 나도 그러고 싶다. 좋아는 것 하다 가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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