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지역 유일한 비전향 장기수 마지막길
북에 있는 처자식 품서 여생 소원 못 이뤄
공작원 남파 29년 복역, 전향 강요에 저항
추석 코앞 별세에 문빈정사서 민족통일장
“고문도, 감옥도, 분단도, 병도 없는 그곳에서 편히 쉬소서.”
광주지역 유일한 비전향 장기수 서옥렬씨가 끝내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올해 한가위 때 마지막 길을 떠났다.
평생 통일·평화의 길을 걸어온 그의 소원은 여생을 북한에 있는 처자식의 품에서 보내는 것이었다.
통일애국열사 서옥렬 선생 민족통일장 장례위원회는 14일 오후 광주 동구 문빈정사 극락전 앞마당에서 ‘서 선생 민족통일장 영결식’을 열었다.
영결식은 민중 의례, 연보 낭독, 조사, 호상 인사, 조가, 헌화 순으로 진행됐다.
광주·전남지역 시민사회·통일·민주화·종교·오월 등 각계 60여 단체로 꾸려진 장례위원회는 ‘아내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가슴에 품고 떠난 그를 추모했다.
또 통일·민주화·인권 운동에 헌신해온 그의 뜻에 따라 자주 통일에 앞장서겠다는 염원을 모았다.
고문 후유증으로 병마에 시달리던 서씨는 지난 11일 오전 9시42분 향년 92세로 별세했다.
서씨의 삶은 이념 대결로 이어져 온 남북 관계의 모순과 고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1927년 전남 신안에서 5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고려대 경제학과에 재학 중이던 1950년 6·25 한국전쟁을 만나 인민군에 입대했다.
1955년 북녘에서 교원 생활 도중 결혼했다. 1961년 8월9일 아내와 두 아들(당시 5살·3살)에게 인사도 하지 못한 채 안내원들과 함께 공작원으로 남파됐다.
고향에서 동생들을 만나고 한 달 뒤 월북하다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
구형과 선고를 합해 사형 소리만 6번을 들었지만, 최종 판결에서 무기 징역형을 받아 1990년 9월29일까지 29년간 옥살이를 했다.
이 과정에 존엄성과 자기 결정권을 박탈당했다. 사상 전향을 강요한 고문 후유증으로 왼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면서도 전향 강요에 저항, 단식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 민주 질서에 어긋나지 않게 살겠다’는 준법 서약서를 썼다는 이유로 2000년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북한으로 송환될 때 가지 못했다.
서약서가 전향서처럼 왜곡된 것이다. 사상전향제도와 준법서약서는 1989년과 2003년에 폐기됐다.
출소 이후 전국의 민주화·통일·인권 운동 현장을 다니며 기록·연구했고, 통일·경제·정치·지리·역사 관련 교육·저술 활동을 해왔다.
지난 2015년까지 25년 동안 보호 감찰법에 따라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고, 연좌제로 가족까지 징역을 살거나 취업을 할 수 없었다.
그는 민족의 대명절에도 밥 한 끼 함께 먹을 가족 없이 쓸쓸한 나날을 보내왔다.
자신이 살아온 삶을 자식들에게 전해주려고 출소 당일부터 일기를 써온 그는 명절 때도 통일을 바라는 마음을 글로 남겼다.
1998년 1월28일·10월5일에 쓴 일기에서 ‘온 겨레가 옛부터 축하한 명절, 그러나 남북은 갈라져 있다. 썰렁한 단칸방에 명절은 없다. 언제 하나로 즐거워할 때가 오려나’라고 적었다.
그는 지난 2017년 추석을 사흘 앞두고 “명절 때면 더 사무치게 가족이 그립다. 아내가 살아있다면 꼭 함께하고 싶다. 가족과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는 일상을 누리고 싶다”고 호소했지만, 끝내 신념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서씨는 투병 생활 중 “기회가 닿으면 유해를 북녘의 가족에게 전해달라”고 송환추진위에 거듭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은 조사를 통해 “선생님께서는 분단시대를 겪으며 모진 수모를 당했다. 통일되는 그 순간 ‘당신을 부둥켜안고 덩실 덩실 춤추는 희망’을 간직하다 가셨다. 청빈·정의·공정의 사표였던 그의 뜻을 기리겠다. 민족적 과제를 반드시 해낼 것을 말씀드린다”고 밝혔다.
박동기 남녘현대사연구회장도 “‘우리 민족끼리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단결하는 데 주저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을 잊지 않겠다. 선생님의 염원이신 통일 조국을 비추는 한가위 보름달을 기다린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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