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연쇄살인의 유력 용의자 이춘재(56)가 30여년 만에 입을 열었다. 무기수로 살면서 입을 다물어 온 이춘재의 입을 여는 데는 프로파일러들의 활약이 결정적이었다.
범죄심리 분야 전문가들은 프로파일러들이 이춘재와의 상호신뢰관계를 꾸준히 쌓아온 것이 그의 자백이라는 성과를 이끌어냈다고 평가했다.
또 이춘재가 이미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고, 화성 사건의 공소시효가 끝나 자백을 해도 상황이 크게 악화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실리적 계산도 자백의 배경에 깔려 있을 것이라는 분석을 제기했다.
◇“자백, 갑자기 이뤄진 것 아냐…신뢰 쌓으며 입 열었을 것”
“심리전에 말려들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이춘재의 자백이 갑자기 이뤄진 성과가 아니라 범죄심리 분야 전문가인 프로파일러들이 꾸준히 노력한 결과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 교수는 “9번의 면담 중에 충분히 신뢰관계가 형성이 돼서 자백이 이뤄졌다고 보인다”며 “어느날 갑자기 심경의 변화가 생겨서 기적적으로 한번에 한 게 아니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라포르(Rapport)’라고 불리는 상호신뢰를 형성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을 것이라는 데 입을 모았다.
이 교수는 “연쇄살인범일수록, 사이코패스일수록 권위적인 태도에 적대적이고 저항하는 모습을 보인다”며 “그런 특성을 고려해 신뢰관계를 형성했어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정식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도 “상대에 대한 신뢰를 쌓고 나면 자기의 속마음을 이야기하게 되고, 상대가 그 이야기를 잘 들어주면 원하는 것 이상으로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는 것”이라며 “면담 초기뿐 아니라 전체 과정에서 라포르는 항상 유지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쇄살인범은 자신의 범죄를 과시하고 싶어하는 성향을 가진 경우가 있는데, 면담 과정에서 이 부분을 공략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직접 면담에 참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정할 수는 없다”면서도 “이춘재에게서 관심받고 싶어하고 이 상황을 즐기려는 모습이 보였다면 그런 과시욕을 자극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DNA 발견으로 가석방 물건너가…심적 부담 덜려 했을지도”
이춘재가 자백을 해도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이 나빠지지 않을 것이라는 실리적인 계산도 입을 여는 데 한몫을 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이어졌다.
화성 사건의 공소시효가 이미 끝나서 자백을 해도 추가로 처벌을 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는 데다, 무기수로 복역 중인 상황에서 발뺌할 수 없는 DNA 증거까지 제시됐으니 가석방도 사실상 물건너갔을 것이라는 셈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 교수는 “아마 (자백을 해도) 사형선고가 되지 않을 것이고, 선고된 내용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말부터 하며 접근했을 것”이라며 “어차피 가석방도 물건너갔고, 비밀을 발설하고 싶은 인간 본능의 욕구가 있으니 프로파일러들이 그점을 파고들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오 교수도 “공소시효가 만료돼서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다는 것을 본인이 알고 있었을 것”이라며 “가석방만 포기한다고 생각한다면 무섭거나 두려운 게 없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자백을 하는 데는 심적 부담과 스트레스를 털어버린다는 의미도 있다”며 “이런 점들을 고려했을 때 독방에 앉아서 ‘어떤 게 자신에게 더 나은 방향일지’ 고민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자백해도 처벌 못하지만…국민엔 안정감·범죄자엔 경고 메시지”
전문가들은 또 이춘재가 자백을 했다고 해서 처벌을 현재보다 가중할 수는 없지만 30년 넘게 미궁에 빠졌던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발견됐다는 점, 국민에게는 심리적 안정감을 줄 수 있다는 점 등 자백의 의미가 적지 않다고 평가했다.
오 교수는 “이춘재를 처벌한다는 실익은 없지만, 국민들의 정서적 측면에서는 ‘끝까지 진실을 밝힌다’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정진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적어도 이춘재가 가석방만큼은 확실히 되지 않을 것”이라며 “국민에게는 ‘수사기관이 열심히 하고 있다’는 안정된 메시지를, 범죄자들에게는 ‘언젠가는 잡힌다’는 메시지를 주는 계기가 됐다”고 자백의 의미를 짚었다.
이춘재가 자백을 뒤집을 우려가 있다는 시각과 관련해서는 “자백의 내용이 공개됐다는 건 자백의 신빙성을 검토하는 작업을 어느 정도 마쳤다는 것”이라며 “자백의 구체적인 내용을 당시 사건기록과 대조를 하고 검토한 뒤 공개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춘재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이후 사건을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은 프로파일러들과 이춘재가 총 9차례 접견조사를 받았으며 라포르가 형성된 것이 자백을 받아내는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이춘재의 심경 변화는 지난 주말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프로파일러 중에는 2009년 여성 10명을 살해한 강호순의 자백을 끌어낸 공은경 경위(40)도 포함됐으며, 지난달 18일 이춘재와의 첫 대면조사때 부터 투입된 공 경위는 매일 같이 부산교도소에 수감 중인 그를 만나 압박과 회유를 반복하며 라포르를 형성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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