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오후 서울지하철 2호선 문래역 7번 출구로 나와 150m가량 걸어 골목으로 들어가자 아파트숲 뒤로 도심 속 낯선 외딴섬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정밀’ ‘○○철강’ 등의 간판을 단 수많은 작은 철공소가 눈앞에 가득했다. 유리창에는 ‘프레스 금형’ ‘강판’ ‘특수용접’ 등의 글씨가 빼곡했다. 기계로 무거운 부품을 옮기고 철근을 자르는 등 작업이 한창이었다.
○ 공장+예술+맛집의 오묘한 놀이터
용접 불꽃과 쇳가루를 뒤로하고 한 발 더 걸어 들어가자 철공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 다시 한 번 펼쳐졌다. 큰 창문에 흰색 커튼을 설치해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한 점포부터 각종 넝쿨식물과 꽃으로 꾸며놓은 곳까지 보였다. 전자는 예술인의 작업실, 후자는 맥줏집이다. 철공소의 장인정신과 예술가들의 창작열, ‘핫플레이스’가 어우러져 이색적인 불꽃을 튀긴다.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은 1960년대 이후 철강산업단지로 전성기를 누렸다. 한때 소규모 공장이 1000곳 넘게 밀집하기도 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이후 철공소가 하나둘씩 문을 닫고 임대료가 내려가자 빈 공간을 홍익대 앞과 대학로 등에서 옮겨온 예술인들이 메우기 시작했다.
예술가들의 등장은 철공소 골목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곳 예술인들을 지원하는 서울시 산하 문래예술공장은 100여 곳의 문화공간에서 300여 명의 예술가가 활동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문래동의 매력이 알려지면서 최근 3년 새 철공소와 예술인 작업실 사이로 식당과 카페, 술집 등까지 들어서 이질적인 공간들의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는 동거가 이어지고 있다.
문래동의 풍경은 시간에 따라 확연하게 달라진다. 이날 정오경 식당과 카페는 점심을 먹으러 온 인근 지역 직장인들로 붐볐다. 하지만 오후 1시가 넘어가자 방문객은 사라지고 기계소리가 가득한 철공소 골목으로 바뀌었다. 오후 5∼6시 공장 문을 닫기 시작할 즈음부터 저녁식사나 술 한잔 하러 오는 발걸음이 늘면서 거리의 조명과 음악, 냄새가 바뀐다.
방문객들은 이곳을 찾는 이유로 ‘뉴트로 감성’을 꼽았다. 문승주 씨(29)는 “공장들 사이에 맛집이 들어서 있는 모습이 부자연스러운 듯하면서도 매력이 있다”고 말했다. 안지연 씨(28·여)는 “옛날 TV에서나 볼 법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게 새롭게 느껴진다”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핫플레이스를 검색하다 알게 돼 찾아왔다”고 말했다. ○ 도시재생으로 ‘기묘한 공생’ 이어간다
다만 이 같은 독특한 공생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아직까진 뚜렷하게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진 않았지만 몇 년 전부터 주목받으면서 임대료가 조금씩 상승하고 있다. 문래동에서 20년 넘게 살균기 등을 제작해온 소공인 A 씨는 “불경기 속에서는 월세가 10만 원 오르는 것도 큰 부담인데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월세가 더 오를까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이곳 원주민인 소공인들이 방문객 증가를 부담스럽게 느끼는 분위기도 있다.
서울시는 문래동이 소공인과 예술인, 자영업자가 공존하는 문화공간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2017년 낙후된 서남권 지역을 견인하기 위해 영등포 경인로 일대를 경제기반형 도시재생활성화 지역으로 선정한 데 이어 최근 관련 계획안을 발표했다. 청년 소공인과 예술가가 임대료 상승 걱정 없이 활동할 수 있도록 임대공간을 조성하고 시제품 제작을 위한 공유 공간과 장비 등을 갖춘 산업혁신센터도 3곳 이상 조성할 계획이다. 7월에는 지역 자산을 높이고 지역 공동체를 활성화하기 위해 문래동의 기계금속장인과 문화예술인, 지역주민이 참여해 지역축제를 기획하거나 조형물 제작을 하는 등 주민공모사업 13개를 선정해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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