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복입은 판사 “불편없나” 환자복 피고인 “괜찮다”
치료 맡은 병원장 “약물치료로 공격성 줄고 호전
“치료사법(司法)의 취지에 따라 지금부터 ‘피고인’을 ‘환자’로 칭하겠습니다.”
14일 오전 10시 30분 경기도의 한 병원이 법정으로 변신했다. 빈 진료실에 놓인 ‘ㄷ’자 책상 가운데 법복 대신 양복을 입은 판사 3명이, 양옆 책상에는 의사와 변호사가 각각 앉았다. 재판이 시작되자 교도관 대신 간호사가, 수의 대신 환자복을 입은 피고인이 방에 들어왔다.
이날 재판은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A 씨(67)에 대한 조사 기일이었다. 서울고법 형사합의1부(부장판사 정준영)는 치매 중증환자인 A 씨에게 구금보다 치료가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국내 법원 최초로 치매 환자에 대한 ‘치료사법’을 시도해 입원 치료를 조건으로 6월 보석을 허가했다. ‘치료사법’은 법원이 형벌로 피고인을 단죄하는 것을 넘어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보석이 허가됐지만 살인을 저지른 A 씨를 받아줄 병원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100곳 넘는 병원이 법원과 연계돼 있는 미국과 달리 국내 치료사법을 위해선 A 씨의 가족이 직접 나서야 했다. 보건복지부와 지자체, 치매병원 등에 일일이 문의했지만 돌아온 답은 “모르겠다”, “안 된다”뿐이었다. 법원의 첫 치료사법 시도가 무산되는 듯했지만 병원장 B 씨가 결단을 내렸다. B 원장은 “A 씨를 만나 보니 일반 치매 환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치료를 해야만 했다”고 했다.
지난달 보석으로 풀려나 병원 치료를 받은 지 한 달이 지나 열린 첫 ‘병실 재판’에서 A 씨의 표정은 한결 나아 보였다. 정 부장판사가 “병원 생활에 불편함은 없느냐”고 묻자 “괜찮습니다”라고 답했다. B 원장도 “A 씨가 처음 한두 차례 공격성을 보였지만 지금은 약물치료를 해 문제가 없다”고 했다. 구치소로 면회 온 자녀에게 “네 엄마는 어딨느냐”고 묻고, 법정에서 재판장이 거듭 불러도 대답조차 못하던 때와 비교하면 많이 호전된 것이다.
재판부는 치료 상황을 추가 점검한 뒤 내년 초 병원에서 선고 공판을 열 계획이다. A 씨의 아들은 “어머니가 살아계셨으면 가족이기에 아버지를 용서하셨을 것”이라며 “살아계시는 동안 치료받으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울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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